신라와 백제의 건국과정에 대한 다른 이야기
논설 모음집 > 역사논설 - I > 다시 쓰는 留記: 丸熊虎史 의 글/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이라고 한 이유
지나사서를 보면 아주 이상한 구절이 있습니다.
<북사>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155],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화하 · 고구려 ·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 · 불내(不耐) · 한예(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수서>나 <통전>도 모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기록이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해답은 <삼국사기>를 면밀히 검토하다보면 나옵니다.
1)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기록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도읍 동북쪽에 있는 당은포로가 곧 상주이다)
삼국사기 신라 지리지를 보면 신라의 도읍이었던 월성이나 금성이 어느 주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慶州라는 곳은 고려때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신라 어느 주에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의 지리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라지리지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하고 혹은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혁거세가 처음 도읍한 곳은 금성(金城)입니다.
그리고 후에 월성(月城)으로 옮깁니다.
임금이 많이 거처한 곳은 금성이 아니라 월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신라지리를 보면....
신라 경계 안에 세 주(州)를 설치하였으니, 도읍[王城] 동북쪽의 당은포로(唐恩浦路)에 해당하는 곳을 상주(尙州)라 하고, 도읍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도읍의 서쪽을 강주(康州)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기록이 보이죠.
도읍의 동북쪽에 상주(尙州)가 있다고 합니다.
상주는 현재 경상북도 서북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도읍은 현재 경주가 아니라 상주의 서남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주의 서남쪽이 금성(金城)일 가능성이 있는데 제 글을 계속 읽다보면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계속 신라지리를 보죠.
신라 영토의 넓이가 이처럼 매우 컸었다. 그러나 신라가 쇠퇴하게 되어서는,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흩어져서 강토가 날로 줄어들다가, 마지막 왕 김부(金傅)가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귀의하자 그 나라를 경주(慶州)로 삼았다.
현재 경주라는 곳은 김부(金傅)가 도읍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신라지리지에 첫 도읍이 금성이고 후에 월성으로 옮겼으며 후대의 임금들은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했으므로 현재의 경주는
월성이었다라는 것을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2) 사로(斯盧)의 이해
신라의 초기 국호는 서나벌(徐那伐) 혹은 사로(斯盧) 혹은 사라(斯羅)이었고 후에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가 신라(新羅)가 됩니다.
그리고 도읍도 금성과 월성 등 두 군데가 존재합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사로국의 위치나 계림국의 위치를 비슷한 곳으로 보고 금성도 월성과 비슷한 곳으로 보지만... 사로국은 상주이며 계림국은 경주입니다.
왜그런지 살펴보면....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는 기록이죠. 고허촌의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는 기록입니다.
위에 나온 6부는 유리니사금때 이름이 바뀝니다.
9년(서기 32)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를 점량부(漸梁部)<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은 위 기록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합니다. 즉,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사량부였는데 후대에 고허부로 고쳤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량부는 한자의 음을 빌어 쓴 것이나 고허부를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뽑아 임금으로 삼았던 곳은 사량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량부가 아니라 사량촌((沙梁村)입니다.
村이란 옛 우리말로 '벌' 혹은 '불'이죠.
따라서 사량촌의 옛말을 추측하여보면 "사량벌"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습니까?
이곳이 바로 "서나벌"인 것입니다.
즉,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임금으로 삼았다던 사량촌의 옛말인 "사량벌(沙梁伐)"이 곳 "서나벌(徐那伐)"이고 뒷글자 "벌"을 생략한 이름인 "사량"의 전음이 사로(斯盧) 즉 "사라(斯羅)"입니다. 그리고 이곳의 도읍이 새성(金城, 새의 ㅏ는 아래아)입니다. 새성(金城)은 金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입니다.
박혁거세가 세웠다던 서나벌은 사량부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3) 계림(鷄林)의 이해
계림(鷄林)이란 곳도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죠. 삼국사기에 닭의 상서로움이 있어 계림이라고 하였다 기록하였으나 우리 민속에 닭은 그렇게 귀한 동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계림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영평 3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구림이라고도 한다)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무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 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우리 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김알지를 발견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김알지의 뜻이 "아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 고대 신앙인 日月星 신앙과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이를 뜻하는 "알지"란 日에 미치지 못하는 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鷄란 우리말로 "닭"입니다. "닭"이라 쓰고는 "달"이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
뒤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말 같은 "이"가 나오면 "달기"라고 발음됩니다.
그리고 林이란 "불" 혹은 "벌"과 같이 발음을 것입니다. "수풀"을 차음한 것이죠.
鷄林이란 따라서 "달불"이란 말이며 계림의 수도가 바로 月城인 곳입니다.
4) 계림(鷄林)이 사라(斯羅)를 점령하다
지금까지의 해석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역사는 사라(斯羅)와 계림(鷄林)의 역사를 합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씨와 석씨의 역사는 진한에 속하였던 사라(斯羅)의 역사이며 김씨의 역사는 계림(鷄林)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각각 두 나라가 존재하였었는데, 계림이 사라를 공격하여 하나의 나라가 되어 버리는 것을 의심케 하는 삼국사기 기록이 보입니다.
尙州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상주는 첨해왕대에 사벌국을 취하여 주로 삼은 것이다.
여기 사벌국(沙伐國)이란 사량벌국(沙梁伐國)을 말합는 것인데 아주 의미 심장한 구절입니다.
신라의 초기 역사가 서나벌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서나벌은 사량부이고 이곳이 바로 사량벌국 즉 사벌국이며 첨해왕때 점령하여 상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죠.
즉, 신라지리지에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라는 구절의 王城이란 계림의 수도 월성이 아니라 서나벌(사량부)의 수도 금성의 동북쪽을 상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최치원전에 보면
崔致遠字孤雲王京沙梁部人也
최치원은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사량부가 경주가 아니라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상주라는 것도 분명해지며 사량부가 한때 왕경(王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림이 사라를 점령한 때가 언제냐? 이때는 관구검이 공손씨를 점령하여 멸망시키고 韓(진한)을 멸망시킨 때입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중략...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校勘 130] [註021]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 연간(AD237~239)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중략... 부종사 오림이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마한의) 신지(臣智)는 (진)한을 격분하게 하여 (진한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흔이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진)한을 멸하였다.
즉, AD239년을 기점으로 진한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한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사라국은 그 힘이 미약해졌던 것이죠.
이것을 기회로 삼아 계림은 사로를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첨해왕 재위때에 사량벌국이 옛날에 신라에 속하였다가 홀연히 백제로 돌아가니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멸하였다.
첨해왕은 AD237년에 즉위하였습니다. 석우로는 석우로는 AD239년에 죽습니다. 아마도 사량벌국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봄직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실로 사량벌국이 옛날에 신라에 속하였냐는 것입니다.
동사강목에 보면...
첨해왕 3년(AD239년) 봄 계림이 사량벌국(沙梁伐國)을 멸하였다.
석우로(昔于老)를 보내어 토벌하였는데, 그 나라가 백제에도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유리왕(儒理王) 이래 이때까지 여러 소국을 병합한 것이 모두 12개 국이니, 이로부터 나라가 더욱 강성해졌다.
백제에 속하였던 사량벌국을 239년에 토벌하고 드디어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량벌국이 얼마나 컸던 나라이기에 이 나라를 멸하고 강국이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사량벌국이 바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며 이것이 바로 진한이라는 말입니다.
즉, 계림은 239년이 관구검이 공손씨를 멸하고 진한을 멸하였을때를 기회로 삼아 진한을 점령하고 비로서 큰 나라가 되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추론이 맞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의 왕력은 모두 거짓입니다.
박혁거세거서간에서 시작한 박씨의 왕력은 모두 사로국의 왕력이며 사량벌국 멸망이전의 역사입니다.
벌휴이사금에서 경순왕까지의 왕력은 모두 석탈해를 시조로하는 계림국의 왕력이며 사량벌국 멸망 이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박혁거세거서간에서 시작한 박씨의 사로국 왕력은 사량벌국이 멸망할때까지인데 아달라이사금에서 끝났으며,
석탈해에서 시작한 석씨의 왕력은 신라라는 하나의 나라를 만들다보니 그 연대가 매우 이상하고,
김알지에서 내물마립간까지의 왕력을 많이 생략되어 그 중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량벌국을 멸망시킨 석우로의 연대도 좀 이상하게 되었죠.
김부식은 이 모든 것을 숨기기 위하여 서나벌과 사량벌이 다른 것처럼 썼으며
금성과 월성이 어느 州에 속하였는지 기록하지 않았고...
알게모르게 사량부가 상주라는 것과 王城의 동북이 바로 상주라는 것만 의도하지 않았지만 포함시켰죠.
즉,
"서나벌=사로국=사량벌국=사벌국"이고 이는 진한의 역사이며 박씨와 석씨의 역사입니다. 도읍은 새성(金城, 쇠성)이죠.
"계림(鷄林, 달벌)"은 김알지 계통의 역사이고 진한이 와해된 틈을 노려 서나벌을 점령하고 신라의 역사를 새로쓰게 되는 것입니다. 도읍은 월성(月城, 달성)이죠.
과연 사량벌국이 계림에 속하였다가 백제에 속하였는지, 아니면 원래 사량벌국이 백제의 부용국으로 진한에 속하였던 나라인지....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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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왕기가 진짜인 이유
남당사료 중에 백제왕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곳에 보면 구지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입니다.
그런데, 구지왕기에는 공손씨가 구지왕에게 딸을 주는 기록이 보이며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위구태임이 분명합니다.
위구태는 부여의 왕이지 백제의 왕이 아니므로 구지왕기는 가짜인듯 하나....
백제와 공손씨가 매우 가까운 동맹을 맺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5년 (238년)
여름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대체 이 기록이 뭔가하고 봤더니 해답은 동사강목에 있었습니다.
<동사강목> 권2 상 백제 고이왕 5년 (위 명제 경초 2년, 238년)
황룡(黃龍)이 궁궐문에서 날아 나왔다.
○ 이 해에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쳐서 죽이고 요동을 취하였다. 의(懿)가 출병할 때에 고구려 왕이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어 병사 1천을 거느리고 이를 도왔다.
○ 위가 장수를 보내 낙랑군(樂浪郡)ㆍ대방군(帶方郡)을 취하였다. 이 때에 2군이 중국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에 분속(分屬)되어 있었는데, 위가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였다. 이에 요동ㆍ현도ㆍ낙랑ㆍ대방이 모두 위에 속하였고, 한(韓) 땅에 있는 여러 나라의 신지(臣智)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내렸으며, 그 다음은 읍장(邑長)을 삼았다. 그 풍속은, 머리에 책(幘)을 쓰기를 즐겨하였고, 하호(下戶)가 군(郡)에 나아가 조알(朝謁)할 때는 모두 책(幘)을 빌어서 썼으므로, 스스로 인수를 차고 책을 쓴 자가 1천여 인이었다.
부종사 (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 치하였다 해서,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여 주었다. 상고하니, 이때에 신라ㆍ백제란 칭호가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중국인이 신라ㆍ백제를 한국(韓國)이라 불렀다. ○ 《삼국지(三國誌)》ㆍ《문헌통고》에서 보충
삼국사기는 위나라가 장수를 보내어 공손연을 죽이고 낙랑과 대방을 취하고 韓이 멸망한 것을 기록하지 않고, 그 대신 알 수 없는 암호인 "황룡이 궁궐에서 나왔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해댔을까요?
이유는 백제가 공손씨의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을 숨기기 위함이었겠고 또한 공손씨와 韓이 238년에 멸망하자 백제는 비로소 독립국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이것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죠.
다시말해 삼국지에서 공손씨가 딸을 주어 동맹을 꾀하였던 위구태는 동부여의 왕이 아니라 온조가 건국한 백제의 왕이었던 것인데 이런 역사를 숨기다보니 황룡이 밖으로 나왔다는 암호만 남겨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백제가 왜 238년에 독립을 하게 되었는지 제 추측이 심하게 들어간 "소설" 한번 써보겠습니다. 소설이라고는 하나 모두다 근거가 있은 것이니 이상한 점을 질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백제 독립 과정>>
백제의 독립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 멀리 기후(箕詡)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1) 기후(箕詡)에서 위만조선의 멸망까지
기후(箕詡)가 정권을 찬탈하였을때 영토는 서해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하북성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를 아우르는 아주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大海中東西以海限, 바다를 가운데에 두고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막히었다). 그리고 국가명은 조선이 아니라 마한(馬韓)이었는데 그 뜻은 맑한 즉 선명국(鮮明國)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한(馬韓)은 제후국을 2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진한(辰韓)이고 두번째는 변진(弁辰)이죠.
마한국은 기준(箕準)에 이르러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이동합니다. 보통 기준이 쫓겨간 곳이 한반도라고 알고 있으나 제가보기에는 기준이 이동한 곳은 은(殷)나라 남쪽땅입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남은(南殷)에 대한 변증설
일찍이 어떤 책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미처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 만년에 국세(國勢)가 미약해진 데다 또 위만(衛滿)의 난(亂)으로 인해 남쪽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이른바 남은(南殷)이다. 남은은 위만과 여러 번 싸웠으나 싸울 때마다 패하였다. 이때 방장군(龐將軍)이란 자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그의 아내는 기와 굽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더욱 노기(怒氣)를 품고 출전하여 용맹한 적장(賊將)을 죽이고 크게 승첩(勝捷)하여 돌아왔다. 그 후에 남은무종(南殷武宗)이 한무제(漢武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위만을 토평(討平)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온 장수가 이곳 기와 굽는 사람의 딸에 대한 용맹을 듣고는 크게 놀라 이상하게 여기며, 그녀가 쓰던 큰 칼을 보고 말하기를 '이 칼은 무게가 1백여 근(斤)이나 되겠다.' 하였다."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옮겨가 국가명이 남은(南殷)이란 것은 옛 은나라 땅 남쪽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기준(箕準)과 위만은 여러번 전쟁을 했고 남은(南殷)의 임금 무종(武宗)이 漢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고 하죠. 이는 위만을 멸망시킬때 漢의 군사만을 가지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箕準의 군사도 같이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위만의 관료들을 분열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만은 燕나라 사람이지만 箕準은 비록 子胥餘의 자손이라고는 하나 조선으로 귀화한지 약 1000년이 넘었기에 완전한 조선사람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위만조선의 관료들은 옛 조선사람이 많았으므로 漢과 箕準이 같이 침략해오자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 들어서죠. 현도와 진번과 임둔은 북부여나 송양의 비류국에서 차지해버리고 현도군은 위치를 옮겨버리니 남은 것은 낙랑군 하나죠.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 즉 마한의 전쟁 참여에서 시작됩니다.
위만을 멸망시킨 것은 漢 혼자서 한것이 아니라 箕準의 마한이 한 몫 한것이죠.
그래서 낙랑군은 漢의 것만이 아니라 마한의 것도 됩니다. 저는 이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이 시기에 진한은 그들을 다스렸던 마한이 위만에 망하여 남으로 이동하였고 그들 동쪽에는 낙랑군이 있으니 진한도 어부지리로 독립한 상태가 됩니다.
2) 백제의 남하와 마한
漢과 마한이 낙랑군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하여 서로 신경전이 계속되어지는 때에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를 합니다. 그리고 마한에게 의지를 합니다.
마한의 임금은 꾀를 내어 마한의 동북쪽 땅, 즉 낙랑의 서쪽 땅을 백제에게 봉지로 줍니다.
왜냐?
그 위치가 낙랑군과 漢 사이의 길목이기 때문에 그 길목을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한은 낙랑군에 대한 다스림을 확고히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3) 漢의 세력 약화와 공손도의 흥기
이렇게 세월이 200년 가까이 흘러 漢은 점점 약화되고 요동지방에 공손도가 일어납니다. 그 지역은 아마도 백제와 인접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낙랑군 서쪽이 백제이고 공손도는 요동군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점점 주변세력을 잠식하여 국가로 발전을 도모하죠.
이러한 상황에 공손도는 자신의 딸을 백제왕인 위구태에게 주어 동맹을 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제도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공손도는 漢에서 독립을 꾀하였고 백제도 마한으로부터 독립을 꾀하였던 것이죠(백제가 건국초기에 마한을 멸망시켰다고는 하나 백제가 200년대에 독립한 것을 숨기기 위한 위사라고 판단).
이런 공손도와 백제의 동맹은 북쪽의 고구려, 서남쪽은 漢, 남쪽의 마한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漢은 3나라로 분리되고 북쪽에 魏나라가 서고 남쪽에 吳나라가 섭니다.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갑니다.
4) 고구려의 선택
고구려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 동맹국으로 吳를 선택합니다. 왜 바다멀리 떨어져 있는 吳를 선택하였는지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만... 하여간 고구려는 吳를 선택하고 사신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동사강목> 고구려 동천왕 7년 (233년)
○ 고구려가 사신을 오(吳)에 보냈다.
이 때에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이 오에 대해 신하[臣]임을 자칭하니, 오주(吳主) 손권(孫權)은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연(淵)을 연왕(燕王)에 봉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연(淵)은 그 사신 장미(張彌)를 목베어 머리를 위(魏)에 보내고 그를 따라온 진단(秦旦)과 황강(黃彊) 등을 현도(玄菟)에 구금(拘禁)하였다. 단(旦) 등이 고구려로 달아나 인하여 오주(吳主)의 전지(傳旨)를 전하면서 ‘하사한 것이 있었는데 요동에서 겁탈당했다.’고 속여 말하니, 왕이 기뻐하여 조의(皂衣) 25인을 보내 단(旦) 등을 吳로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칭신(稱臣)하며 초피(貂皮) 1천 매(枚)와 갈계피(鶡雞皮) 10구(具)를 공물로 바쳤다. 《자치통감》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보충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입니다. 풀어서 보면...
고구려가 吳를 동맹국으로 선택하자 공손연은 吳의 신하임을 자칭하죠.
왜냐?
고구려가 吳와 동맹을 하는 것을 중간에서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고구려는 남쪽 바닷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낙랑군과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런 고구려의 어려움을 알아챈 공손연이 고구려와 吳의 동맹을 방해하려고 공손연이 吳의 신하임을 자칭하여 육로 혹은 바닷길을 고구려에 터주죠.
하지만 고구려 사신을 吳에 보내기는 거녕, 사신은 잡아 魏에 보내버리고 따라온 자들은 강금합니다.
고구려는 吳와 동맹을 하기 위한 사신들이 실패하자 다시 사신을 吳에 또 보내어 吳와 동맹을 굳건히 합니다.
5) 魏의 공손씨 견제를 위한 고구려와의 동맹
상황이 이쯤되어 공손씨의 세력이 막강해 진것 같습니다.
그러자 魏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고구려와 동맹을 합니다.
아마도 공손씨가 세력이 점점 커져 魏에 위협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魏는 동맹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천왕 8년
8년(234)에 위(魏)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동맹국을 갖게된 魏는 드디어 공손씨를 침략하게 되죠.
<삼국지>공손탁전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
경초 원년, 이에 유주자사 관구검 등에게 새서를 주어 공손연을 징벌하도록 보내었다.
二年春, 遣太尉司馬宣王征淵. 六月, 軍至遼東....중략..., 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2년 봄,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어 공손연을 정벌토록 했다. 6월, 군이 요동에 이르렀다. ...중략.... 요동·대방·낙랑·현토가 모두 평정되었다.
魏가 공손씨를 칠때에 고구려가 도와주죠. 도와주었다기보단 협공이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12년
12년(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왜 고구려는 魏와 협공하여 공손씨를 공격하였을까요?
고구려는 마한과 마한의 속국이었던 백제 그리고 낙랑군 등을 원했기때문이죠.
6) 공손씨 멸망 후 마한, 백제, 진한, 魏 사이의 갈등
지금까지 말한 시대상황을 염두해 두고 앞서 인용한 동사강목 238년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밌죠.
왜 마한의 신지가 魏나라 편을 들고, 진한은 왜 대방군 가리영을 공격하였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서는 왜 이 기록이 빠졌는지를 알게됩니다.
정확히 보기 위하여 삼국지 동이전을 인용해봅니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열전
○ 景初 연간(A.D.237~239) 에 후한의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樂浪)·대방(帶方)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韓)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樂浪)이나 대방(帶方)에 가서 조알(朝謁)할 적에는 모두 의책(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립(吳林)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國을 "統" 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진)한을 멸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 상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箕準의 마한이 위만에 멸망되자 箕準은 산동반도 근처로 이동하고 진한은 독립하게 됩니다.
마한과 漢은 위만을 같이 멸하고 낙랑군이 세워지게 되고, 마한과 漢은 낙랑군 점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신경전을 벌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백제가 남하하자 마한은 낙랑과 漢사이에 백제를 두고 자신의 세력으로 漢을 견제하게 되죠.
복잡한 상황이 더욱더 복잡하게 되니, 백제의 서쪽으로 공손씨가 일어나게 됩니다.
공손씨는 같은 처지에 있는 백제와 동맹을 하고 낙랑군 등을 침략하여 영토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자 난감하게 된것은 마한이죠.
낙랑군을 차지하려고 백제를 漢과 낙랑 사이에 두었는데 그 주변에 공손씨가 일어나 백제와 낙랑까지 아우르게 되고 공손씨의 세력은 아주 커집니다. 마한은 백제와 낙랑을 모두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력이 커질대로 커진 공손씨를 드디어 고구려와 魏가 침략하여 멸망시킵니다.
그리고나서는 魏는 낙랑지역을 마한에게 주려고 합니다.
낙랑지역은 멀기도 한 뿐더러 점차 세력이 커지는 진한을 견제하는데 마한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마도 마한은 魏와 아주 친했던 모양입니다. 혹 魏와 마한이 공손씨를 같이 침략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진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 역시 낙랑군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래서 공손씨가 멸망한 후에 영토를 魏와 마한이 나누어 갖는 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이 회의에서 낙랑군 모든 땅은 마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魏는 요동군을 차지하였겠죠. 고구려는... 모르겠군요.
마한 임금은 생각해보니 아주 잘된 것이었습니다.
백제도 다시 자신들 편으로 만들고 낙랑지역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한의 신지는 통역을 일부러 이상하게 합니다.
진한 지역까지 차지하기 위해서이죠. 그전에 진한은 마한의 영역이었으니까요.
통역을 잘못한 부분은 이것인데
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낙랑이 본래 韓을 통치했으니 진한8국을 나누어 낙랑에 주려 하여하였다.
원래 말은 아마도 이정도 되지 않을까합니다.
樂浪本通韓國, 分辰韓爲八國與樂浪
낙랑은 본래 韓과 한 통속인데 진한이 낙랑과 더불어 8개 국가로 나뉘었다.
마한의 신지가 진한과 낙랑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계책이죠.
그러나 성질이 난 진한은 대방군을 공격하지만 辰韓은 망하게 됩니다.
아마 진한이 멸망할때 마한도 같이 멸망하지 않았나 하며, 이때되어 비로소 백제는 그들을 다스렸던 마한이 망하자 독립하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옛 공손씨의 세력을 모아 영토확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로국 신라도 드디어 이때 되어 독립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다스렸던 진한이 망하였기 때문이죠.
삼국사기는 위 모든 일련의 과정을 숨기기 위하여 구지왕을 뺀 것입니다. 구지왕이 공손씨와 동맹관계였고 공손씨가 멸망하자 드디어 독립국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기때문에 삼국지에 백제와 신라가 없고 오직 韓만 있는 것입니다.
https://sites.google.com/site/coreahistory/editorials/editorial-1/0016?tmpl=%2Fsystem%2Fapp%2Ftemplates%2Fprint%2F&showPrintDialog=1 에서 복사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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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나오는 위구태( 尉仇台)에 대한 이해
후한의 순제(順帝), 영화원년(永和元年:136년)에는 부여왕(夫余王)은 경사(京師/洛陽)에 내조했다.
후한의 환제(桓帝), 연희4년(延熹4年:161년), 부여의 사신이 조하공헌(朝賀貢献)하고 영강원년(永康元年:167년) 부여왕(夫余王)인 부태(夫台)는 2만여 인을 이끌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략하지만 현도군수인 공손역(公孫域)에 의하여 격퇴되고 1000 여명이 참수되었다.
후한(漢)나라 영제(霊帝)의 희평3년(熹平3年:174년), 부여(夫余)는 또다시 책봉 국으로 조공을 바쳤다.
부여(夫余)는 당초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지만 헌제(献帝:재위 189~220년)대에 부여왕(夫余王)인 위구태(尉仇台)가 요동군(遼東郡)에 복속하기를 원한다고 말함으로, 요동군(遼東郡)에 복속했다. 이때는 현도군(玄菟郡)이든 요동군(遼東郡)이든 공손씨(公孫氏:요동의 지배자)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이제국(東夷諸国)은 공손씨(公孫氏)에게 복속했다.
이때는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였음으로 공손도(公孫度:204년 요동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사람)는 그 두 나라 사이에 있는 부여(夫余)와 동맹을 맺고 공손씨(公孫氏)의 종실녀(宗女:公孫度의 딸이라고도 하고, 누이라고도 함)를 위구태(尉仇台:부여의 왕)의 비(妃)로 삼았다.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부여의 왕)가 죽자 간위거(簡位居)가 왕이 된다. 간이거(簡位居)는 적자가 없었고 얼자(孽子:서자)인 마여(麻余)라는 자가 있었다. 위거(位居)가 죽자 제가(諸加:諸大臣)는 공히 마여(麻余)를 세웠다. 우가(牛加:관명)의 형의 이들인 위거(位居)는 대사(大使:관명)가 되고 선정(善政)을 했기 때문에 국인(国人=위국)은 이것으로 연년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遣使) 조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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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 -- 진수의 『삼국지』와 『북사』의 기록에
공손도는 구태와 함께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요동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AD 190년경에는 이들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
( 삼국지 위서 공손도전『三國志』「魏書」公孫度傳 ).
초기국가시대 부여의 제9대(재위:미상) 왕으로서 주변의 고구려와 선비(鮮卑)가 강성하므로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공손탁(公孫度, ?∼204)의 종녀(宗女)주 01)를 부인으로 맞아 들여 공손씨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자국의 안전을 꾀하였다. 서부여의 시조이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뒤 ․마여․ 의려,
(서부여)
위구태( 尉仇台) → 간위거(簡位居) → 마여 → 의려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통전(通典)
2설 --‘『북사(北史)』,『수서(隋書)』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仇台王(구태왕)이 남하하여 온조계의 백제왕조와는 또다른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尉仇台(위구태) = 仇台王(구태왕) = 仇台王(구이왕) = 고이왕이란 설
(台는 태라고도 잃고 이라고도 잃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