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武天皇은 누구일까?
天武天皇은 누구일까?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중 하나이다.
大海人은 천지천황의 견제를 받자, 삭발하고 仏門에 들어가 鸕野讚良 皇女와 함께 吉野로 도망가서
大日寺 (혹은 比曽寺)에 숨었다고 한다.
吉野의 호족(石押分之子=吉野国巣의 祖)은 大海人의 먼 조상인 磐余彦(신무천황)이 東征할때 함께 동행했던 사람이다.
吉野町 南国栖의 村人들은 大海人을 朝廷軍으로부터 보호했으며 춤등으로 그를 위로했다고 전한다(그로부터 유래하는 国栖奏가 매년 旧正月 14일, 天武天皇을 祭神으로하는 吉野町 南国栖의 浄見原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후 천지천황의 아들인 大友皇子의 近江 조정에서 그를 살해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받자 大海人은 아들인 草壁皇子、忍壁皇子, 호위인 朴井連雄君(物部雄君)・大伴連友国등 20여명, 시녀등 십여명과 함께 吉野를 탈출한다. 그때 大分君恵尺을 近江으로 보내 다른 아들인 高市皇子와 大津皇子를 伊勢에서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吉野로부터 津振川을 건너서 菟田의 安騎에서 大伴連馬来田등이 합류한다.
이때부터 大伴氏는 大海人을 받들어 大海人 왕조를 일어키고 重臣이 되기로 결심한다.
甘羅村을 지날때 大伴의 일족인 大伴朴本連大国을 수령으로 하는 20여명의 포수들을 모운다.(大国도 大伴의 一族이었다)
大野(旧室生村)로부터 隠郡(名張市)를 밤중에 행군하여 伊賀郡에 이른다.
伊賀郡中山에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伊賀郡司가 동참한다.
積殖 산 입구에 왔을때 大津京을 출발하여 鹿深을 넘어온 高市皇子와 동행한 8명의 호위들이 합류한다.
그리고 大山(鈴鹿山脈)을 넘어서 伊勢国의 鈴鹿郡에 들어가 伊勢国司의 영접을 받는다.
거기서 大海人은 500 여명의 군사를 모아서 鈴鹿 산길을 지키게 했다.
빗속에 行軍하여 三重郡家를 거쳐서 伊勢의 朝明郡의 迹太川(현재의 朝明川)부근에 도착하여 天照大神에게 예배하고 戦勝을 기원한다.
朝明郡에서 또다른 아들인 大津皇子가 大分君恵尺・大分君稚臣등과 함께 합류한다.
또 美濃로 파견했던 村国連男依가 美濃의 군사 3천명을 모아서 不破의 関 (후와노세키: 岐阜県 不破郡)를 봉쇄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不破道는 鈴鹿道와 함께 교통의 요지로서 이곳을 막으면 大津都와 東国을 차단할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高市皇子를 不破로 파견하여 군을 감독하도록하고, 東海道 諸国, 甲斐・信濃의 軍兵을 징집한다.
또한 桑名의 郡家에 鵜野讃良 皇女등 가족을 잔류시키고 자신은 不破郡家로 들어간다.
※ 그 도중에 尾張国司 小子部連鉗鉤가 尾張에서 징발한 농민 2만여명을 이끌고 귀속해왔다( ※ 아래 설명 있음)
大海人은 不破郡家로부터 野上으로 이동하여 行宮을 마련하고 전군을 지휘한다.
(속일본기에서는 尾張大隅는 大海人을 양육했던 大海氏의 동족으로서 私邸를 行宮으로 제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近江朝廷에서는, 大海人軍이 東国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群臣도 나타났다.
大友皇子는 「騎馬軍을 조직하여 추격하였다」라고 하나 이 進言에는 찬동하지 않고, 韋那公磐鍬, 書直薬, 忍坂直大麿侶 3명을 募兵을 위해
東国으로 보냈다. 그러나 不破에 도착하기 전에 大海人의 복병에게 습격을 받아 도망쳐 되돌아온다.
다시 、穂積臣百足, 穂積臣五百枝 형제 및 物部首日向를 倭古京에 파견한다.
5년전에 있었던 近江遷都로 조정대신들은 거처를 大津으로 옮겼지만, 그들의 일족이나 친족은 대부분 倭古京에 남겨진채로 있었다.
募兵과 함께 小墾田에 있는 武器庫에서 무기를 大津宮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거기에 大伴連吹負가 수십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공격해와서 수많은 사람을 베어죽이고, 五百枝와 日向는 포로로 잡혀갔다.
大伴吹負의 기습공격으로부터 大和의 호족들이 속속히 大海人軍으로 들어와서 倭古京은 大海人軍의 수중에 떨어졌다.
반란군에게 倭古京을 빼앗긴 近江朝廷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大海人軍이 東国으로부터 近江 大津宮으로 진군하면, 近江朝廷측은 2방면으로 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大伴吹負의 倭古京 함락으로 기선을 잡은 大海人은 전군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村国連男依와 書首根麻呂등은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不破로부터 琵琶湖 東岸을 똑바로 近江으로 진격했다.
또 紀臣阿閉麻呂등이 인솔한 수만의 군사는 大山을 넘어서 大和로 향했다.
近江朝廷측은 倭古京 탈환군을 조직하여, 장군 大野君果安은 乃楽山(奈良県 北部)에서, 장군 大伴吹負군과 싸워 大伴吹負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倭古京을 지키는 荒田尾直赤麻呂등의 계책에 말려 大野君果安은 京으로 진군하지 않고 군사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한편 琵琶湖 방면으로 향했던 村国連男依군은 息長의 横河에서 境部連薬이 지휘하던 近江朝廷군과 조우했으나 일축해버린다.
또한 安河(野洲川)에서도 近江 조정군을 격파하고,
瀬田(滋賀県 瀬田町)으로 진군, 瀬田橋 동쪽에 포진하여, 大友皇子가 이끌던 近江 朝廷군과 대치한다.
大分君稚臣가 奇計를 내어 瀬田橋를 건너서 조정군을 대파한다. 그사이, 패주했던 장군 大伴吹負은 墨坂(奈良県榛原町)에서
大海人군의 置始連兎과 조우하여, 흩어졌던 병사를 추스려, 大坂道로부터 침공하는 猛将壱岐史韓国 휘하의 近江 조정군을 当麻村에서 맞붙어 패퇴시킨다. 倭京에 돌아오자, 紀臣阿閉麻呂을 東道장군으로 하는 수만의 군사가 모여있었다. 장군 大伴吹負은 3군으로 나눠 大和의 上道、中道、下道에 배치했다.
中道에 포진했던 장군 吹負은 近江조정군 盧井鯨의 급습을 받아 고전한다.
上道에는 三輪君高市麻呂와 置始連兎의 군사가 배치되어, 이쪽으로 진군해왔던 近江조정군을 箸墓 부근에서 대파하고, 中道의 盧井鯨의 배후를 공격한다. 鯨은 패주하여 도망친다.
大友皇子는 재기를 노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만 했었다.
그러나 東国으로 도망가려고 하면 도로도 大海人軍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北国으로 도망치려고 해도 敵쪽으로 등을 돌린 羽田矢国 ・大人의 군사가 三尾城을 함락시키고 남하하고 있었다. 남쪽의 倭古京 방면도 大海人軍에게 점령되어 있었다. 西国으로 피하려고 해도 淀川河畔도 大海人軍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도망칠 길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大友皇子는 粟津丘 가까이 산속에 몸을 숨겼다.
이미 左右大臣이나 群臣들은 모두 도망치고 皇子를 따르던 物部連麻呂와 1,2명의 호위들 뿐이었다. 이미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皇子는 그자리에서 자해(自縊)하고 말았다. 25세였다.
이렇게하여 大海人이 일어켰던 乱은 大海人의 승리로 끝났다.
673年에 天武天皇으로서 飛鳥 浄御原宮에서 즉위하고、天智天皇의 딸이자 蘇我石川麻呂의 외손녀인 鸕野讚良皇女를 皇后로 했다(天智天皇은 장인인 蘇我石川麻呂를 자살로 몰아넣었고, 天武天皇은 天智天皇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처남을 자살케했다)
(※ 위에서 尾張国司 小子部連鉗鉤가 尾張에서 징발한 농민 2만을 이끌고 와서 합류했는데、大海人에게 큰 공을 세웠지만, 乱에서 승리하고 戦犯의 처벌, 논공행상을 하기 직전에 산으로 도망가 자살해 버렸다. 鉗鉤는 大海人이 난을 일어키기 전에、近江朝로부터、美濃 ・尾張国司에게「天智天皇의 山陵을 개조하기 위해 미리 人夫를 지정해 놓으란 명을 받았다. 더구나 무기를 휴대한 채로..이 命은 大海人이 乱을 일어킬 것을 予見하고、東国으로 통하는 不破를 장악하여、東国으로부터 軍兵을 동원시키기 위해서였다. 鉗鉤는 近江朝의 명에 따라, 部民 2万을 모았으나、늦게、不破에 도착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大海人이 美濃의 兵을 参集시켜 있었다. 大海人은 鉗鉤의 2万의 병력을 援軍으로 보고 좋아했지만 실상은 자기편이 아닌데, 鉗鉤가 사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채 自軍을 大海人에게 参軍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로서 鉗鉤は、天智天皇의 아들인 大友皇子가 이끌던 近江 조정군을 감소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鉗鉤은 乱이 끝난 후에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고 잘못된 판단으로、近江朝廷을 멸망시키고 말았다는 것을 후회하여 大海人의 論功行賞 직전에 자살해버린 것이다)
천무천황은 누구일까?
大海人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天智天皇紀에서 大海人은、天智三年에 처음으로 大皇弟로서 나올뿐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은 없다,
天智天皇이 皇子시대、 결사의 각오로 결행했던 「乙巳의 変」(「大化改新」)에서도、또한、百済부흥을 위해 老母 斉明天皇을 旗印으로하여 大軍을 이끌고 筑紫 朝倉宮으로 征西했던 기간에도、大海人의 同行은 명확하지가 않다. 이러한 것은、中大兄皇子와 大海人이 兄弟関係였다라는 것을 충분히 의심케 한다.
大海人이 천지천황의 견제를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를 따르고 보호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物部麁鹿火、大伴金村
物部氏
物部氏는 大和国 山辺郡 ・河内国 渋川郡 부근을 본거지로 한 유력한 호족으로서、神武天皇이 東征하기 전에 먼저 야마토에 들어갔던 饒速日命을 선조로 하는 天孫族系의 神別氏族이다. 饒速日命은 登美夜毘売을 妻로 하여 物部氏의 初代인 宇摩志麻遅命(可美真手命)을 낳았다.
物部氏는 神武天皇보다 먼저 大王家에 출사했던 씨족으로서 원래는 鉄器와 兵器의 제조, 관리를 관장했던 씨족이었지만 점차 大伴氏와 나란히 유력 군사씨족으로 성장해갔다. 雄略朝 무렵에는 大連을 배출하고、각지에 国造를 남기는등、유력한 씨족으로서 활약했다, 物部氏는、刑罰、警察、軍事、呪術、氏姓등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또한、奈良県 天理市街地 주변에 있는 「石上 ・豊田古墳群」「杣之内古墳群」의 피장자는 物部氏 일족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欽明天皇의 때 物部尾輿이 大連이 되었는데 百済로부터 보내진 仏像을 둘러싸고、大臣 ・蘇我稲目을 중심으로 한 崇仏派와 大連 ・物部尾興, 中臣鎌子(中臣氏는 神祇를 제사지내는 氏族)을 중심으로 하는 排仏派가 다투었다. 그후 황위계승과 역병 창궐, 불교문제로 蘇我氏에게 패하여 몰락하게 된다. 그러나 전국의 物部氏系의 国造는 아무 일 없이 계속되었다.
686年(朱鳥元年)에 物部氏로부터 改姓한 石上氏(이소노카미氏)가 本宗家의 지위를 얻게 된다.
大伴氏
大伴氏의 始祖는 天忍日이며、邇邇藝(니니기)와 함께 狗奴国으로부터 日向의 高千穂에 天降하였으며
磐余彦(神武天皇)이 東征할때 曾孫인 道臣이 大久米軍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熊野부터 大和国까지 転戦하여 神武天皇의 大和王権 수립에 큰 공헌을 했다.
그후、狗奴国系의 大王家(天皇家)와 함께 하게 된다(군사씨족, 物部氏가 군사조직, 大伴氏는 황궁경찰, 황궁친위대적인 성격)
垂仁朝에서、武日은 物部十千根등과 함께 大夫가 된다.
景行朝에서는、武日이 倭建의 東征에 吉備武彦과 함께 종군하고 그 공에 의하여 靫負部를 하사받는다.
仲哀朝에서는 大伴連武持는 仲哀朝의 四大夫로서、처음으로 大伴宿禰 姓을 하사받았다.
大伴金村은 平群臣真鳥 ・ 鮪父子의 乱을 평정하여 武烈天皇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大連이 된다.
이후、金村은 반세기 가까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武烈天皇이 후사가 없자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 大臣 大伴金村、物部麁鹿火, 그리고 巨勢男人등에 의해 궁중 기록을 검증하여、丹波国 桑田郡(京都府亀岡市)에 있던 仲哀天皇의 5세손이던 倭彦王을 황위계승자로서 抜擢하여 데리러 갔으나 倭彦王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줄 알고 산속으로 숨었다. 金村은、倭彦王은 大王으로서의 器量이 아니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나、大伴氏에게 있어서는、仲哀天皇의 후손인 倭彦王은 역대의 主君(狗奴国系 王統)의 후예였으므로、私邸로 데려와 가만히 은닉하였다.
그후 応神天皇의 5世孫이라고 하는 26대 男大迹王(継体天皇)이 北陸에서 발견되어 후계자로서 황위에 오르게된다.
欽明1年 (540年)、大伴金村은 物部尾輿등으로부터 任那政策의 실패를 질책당하고、실각한다.
欽明23年(562年)、金村의 아들인 狭手彦이 大将軍으로서 高句麗를 친다.
用明2年 (587年)、金村의 다른 아들인 噛(咋子)가、蘇我馬子에 의한 物部守屋 토벌군에 참가한다. 이때、物部本宗은 멸망한다.
591年 任那 부흥을 위해 大将軍으로서 出陣한다
608年 隋使「裴世清」을 맞이한다.
崇峻天皇이 (588年)즉위하자, 金村의 아들 糠手의 딸 小手子가 妃가 된다. 大伴氏의 女가 처음으로 妃가 되었다
.
推古22年(614年)、中臣御食子의 妻 大伴夫人(大伴咋子의 딸)이 中臣鎌子을 낳는다(훗날 藤原鎌足)
大化5年(649年)、蘇我倉山田石川麻呂가 숙청되고 후임으로서 大伴長徳이 右大臣에 취임한다.
白雉2年(651年)、右大臣 大伴長徳이 죽고, 孝徳朝 말기 이후、天智朝까지 大伴氏의 동정이 전해지지 않고,
또 斉明朝 말년부터 天智 초년(661~663年)에 걸친 백제 구원에도 大伴氏의 활약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이 기간 大伴氏는 중앙정계로터
소외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倭彦王으로부터 백여년후 그 倭彦王의 자손이, 大伴家에서 태어났던 것 같다(출생년은 불명)
磐余彦(신무천황)과 닮은 武勇 ・ 叡智가 뛰어났던 대장부였지만, 약간 猜疑心도 강했다. 그가 바로 大海人(훗날의 天武天皇)이었다.
「大海人은、倭彦王과 大伴氏의 女의 子孫이며、狗奴国 王統의 혈맥을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
『紀』는 출생의 상세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天武天皇의 殯所가 있었던 朱鳥元年(686年)9月27日、
第1番으로 天武天皇의 「壬生의 일을 추도했던 」人物이 있었다. 그는 大海宿禰蒭蒲이다.
凡海氏=大海氏는 阿曇氏와 동족으로서(『新撰姓氏録』右京神別下、摂津国神別)、摂津国을 本拠로 했던 氏族이다.
「壬生」은、「養育」을 말하는 것이며、凡海氏가 大海人을 養育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 大海人의 이름은、凡海(오오아마)氏의 女性이 乳母였기때문에 붙혀졌다(Web).
그리고、阿曇氏의 본관은 奴国이며、狗奴国의 本貫이기도 하다.
当時、不遇에 움추려들어 있던 大伴氏가、百済구원과 新羅西征의 重鎮이었던 凡海氏에게、大海人의 養育을 의뢰했을 것이다.
거기서、畿内에 있던 귀화한 新羅人에게 무술, 天文 ・遁甲 (占術 ・呪術) 을 배웠을 것이다.
왜 신라인으로부터라고 하는가?
『藤氏家伝』은、어느 날 宴会에서 흥분했던 大海人皇子가 長槍을 들고 床板을 내려꽂자、
성이 난 天智天皇이 皇子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藤原鎌足이 가운데 나서서 말려서 아무일 없이 지났다고 한다.
天智7年(668年)의 일이라고 한다. 長槍은 신라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기인 것이다.
이 설화에서 보이는 大海人과 天智天皇의 관계는、兄弟라고 하기보다는 主従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라 느껴진다.
내가 생각하는 大海人은、大伴夫人(智仙娘、大伴咋子의 딸)을 매개로 하여、아들인 中臣鎌子(藤原鎌足)(614〜669年)와 그의 아들
藤原史(不比等 659〜720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大海人은、鎌子로부터 유능한 新羅人(혹은 鮮卑人)을、소개받았다고 생각한다.
孝徳朝 말기 이후 天智朝까지、大伴氏는 중앙정계에서 소외되고 있었지만,
이즈음、성장했던 大海人은 大伴夫人의 아들 中臣鎌子의 후원으로 朝堂에 들어가 、遁甲을 구사하는등 활약하여, 中大兄皇子의 총애를 받았을 것이다. 白雉4年(653年)、中大兄皇子가 孝徳天皇과 결별하여、孝徳天皇이 造営했던 難波京으로부터 倭京(飛鳥)으로 옮겨갔을때도、大海人은 中大兄皇子등과 행동을 함께하고 있다.
『紀』는 皇弟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것이 大海人의 최초 출현이다.
倭京宮에는 中大兄皇子의 어린 딸 大田皇女와 鵜野讃良皇女가 있었다. 그녀의 모친은 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딸 遠智娘이다.
石川麻呂는 中大兄皇子와 中臣鎌子가 蘇我入鹿을 칠때 (乙巳의変) 동지였지만,
蘇我石川麻呂는 훗날 誣告에 의하여 中大兄皇子에게 공격을 받자 자살했다. 遠智娘은 아비의 적인 中大兄皇子에게 시집가서 딸 大田皇女, 鵜野讃良皇女, 아들 建皇子를 낳은 후, 父의 죽음을 탄식하다 病死한다. 建皇子는 벙어리인데다 요절한다. 大田皇女와 鵜野讃良皇女는 이러한 비극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祖父를 자살케한 中大兄皇子의 허락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斉明7年으로부터 天智2年까지、大海人은 中大兄皇子와 那의 大津宮에 있었겠지만, 動靜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어차피, 다루기 곤란한 2 皇女를 大海人에게 시집보낸 대가로서 大海人에게 皇弟의 존칭을 하사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天智天皇紀 、天智3年에 大海人은 大皇弟로서 처음 출현한다.
東宮(皇太子)는 허울뿐이었다.
사실, 天智10年(671年)、天皇은 第1皇子인 大友皇子를 太政大臣으로 임명하고、大友皇子에게 皇位를 잇게할 의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鵜野讃良皇女가 天武의 妃가 되고, 나중에 新田部皇女가 天武의 妃가 되다.
新田部皇女는 狗奴国 혈통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天武天皇에게 있어서 新田部皇女는、먼 선조와 연결되는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궁정에 남겨진 기록을 보고, 天武天皇의 쪽에서 新田部皇女를 원하여 취한 것이라고 하고 싶다. 이렇게하여、『日本書紀』編纂의 立役者、狗奴国 혈통의 天武天皇과 舎人親王이 나란히 갗추어졌던 것이다.
大王을 섬기는 大伴氏의 먼 조상 天忍日이나 道臣의 이야기로부터 狗奴国 왕통을 이해하고, 자신이야말로 그 왕통의 혈맥이었다는 것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를 잘못만나 당시는 邪馬台国 왕통의 대왕의 시대로서, 仲哀天皇의 死後、狗奴国系 왕권은 절멸했었다. 大海人은、그 仲哀天皇의 후예였던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편찬하려고 맘먹는다.
天武天皇의 아들들...
草壁皇子尊・大津皇子・高市皇子・河嶋皇子・忍壁皇子・芝基皇子
「吉野의 盟約」 (679年) 5月6日
天武天皇은、자신이 죽은 후에 예상되는 皇子들에 의한 내분을 피하고자、壬申의 乱의 발상지인 吉野에서 盟約을 엄숙히 시행하였다. 、
「朕은 오늘 너희들과 함께 庭에서 맹세하여 천세가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草壁皇子을 차기 천황으로하여, 異母兄弟간 서로 도우고 싸우지 말것을 맹세시켰다.
바로 草壁皇子尊가 먼저 앞에 나가서 맹세했다.
「天神地祇 및 天皇앞에서 나는 兄弟長幼 합쳐 십여명의 王、異腹형제들... 차별하지 않고 天皇의 勅에 따를것이며 、이후、이 맹약대로 지키지 않으면、身命이 멸하고 子孫이 끊길것이다.」라고 말한후 五皇子가 차례로 나와서 앞과 같이 맹세했다.
686年7月 天武天皇의 건강이 악화되어 鵜野讃良 皇后・草壁皇子가 공동으로 정무를 담당함.
(草壁皇子가 황태자로 봉해짐)
朱鳥元年(686年)9月에 天武天皇이 죽다、
大津皇子의 謀反 -
大津皇子는 鵜野讃良 皇后의 언니인 大田皇女가 일찍 죽고 남겨진 아들로서, 활달한 행동과 훌륭한 언변, 才学있고、詩賦에도 능했으나
10월 2일, 親友 川島皇子의 밀고에 의해、謀反혐의로 체포되어 、訳語田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하게 된다, 24세. 妃 山辺(天智天皇의 皇女)는、머리를 풀어 흩터리고 맨발로 뛰어가 뒤를 따라 殉死했다고 한다.
鵜野讃良 皇后는 병약하고 、器量이 딸리는 자신의 소생 草壁皇子를 皇位에 올리겠다는 목적으로 謀略으로 天武天皇과의 盟約을 皇后 자신이 허물어뜨리고 大津皇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皇后의 기대에도 무망하게 草壁皇太子는 688년 4월13일 황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
持統天皇의 취임 --(690年)1月1日 天智天皇의 딸이자 天武天皇의 황후였던 鵜野讃良 皇后가 천황으로 즉위하여 高市皇子와 함께 정무를 맡는다.
그리고 藤原京을 짓기 시작하여 持統 8年에 遷都한다. 天武天皇과 草壁皇太子와의 생활, 그리고 大津皇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飛鳥 浄御原宮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吉野의 盟約」에서 草壁皇子가 말했듯이「이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身命이 멸하고 子孫이 끊기게 될 것」라고 맹세한대로、草壁의 血統은 내분이 겹친 끝에、天武天皇의 狗奴国 황통은 9代(673〜770年)만에、끊겨지고 말았다.
奈良朝 天武天皇의 자손이 관련된 사건들,
文武天皇과 石川刀子娘 사이에서 난 広成皇子와 広世皇子의 皇籍박탈로부터 시작하여,
高市皇子의 아들인 長屋王이 讒言에 의한 自殺(長屋王의 変),
塩焼王(天武天皇의 孫)의 伊豆 配流,
安積親王(聖武天皇第 2皇子)의 暗殺
道祖王(天武天皇의 孫)廃太子와 그 후 橘奈良麻呂의 変 連座에 따른 拷問死,
恵美押勝의 乱 連座에 따른 淳仁天皇(舎人親王의 아들)등의 配流,
和気王(舎人親王의 孫)絞殺,
不破内親王(聖武天皇의 皇女)의 淡路配流,
井上皇后(聖武天皇의 皇女)廃后와 그후 幽閉死,
他戸親王(光仁天皇의 皇子)廃太子와 幽閉死등을 들수 있다.
天武天皇의 玄孫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孝謙天皇(女帝 749~758年、重祚되어 稱德天皇 764〜770年)을 끝으로、天武系 皇統은 소실된다.
이와같이 반복되는 정변에 따른 숙청으로, 天武天皇의 嫡流(男系)에 해당하는 황족이 없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井上内親王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井上内親王은 聖武天皇의 皇女로서、11歳때 부터 伊勢神宮의 斎王을 담당하고 있었다(727〜744年).
斎王의 임무가 해제되어, 帰京後、
天智天皇의 第7皇子 ・施基親王(志貴皇子)의 第6子인 白壁王의 妃가 되었다.
白壁王과의 사이에 태어난 他戸王은、女系이기는 하지만, 天武天皇系 적통의 피를 잇는 유일한 남성황족이었다.
이로부터 孝謙天皇의 遺宣에 따라 他戸王의 立太子가 행해지고,
神護景雲 4年(770年)10月1日、62歳의 白壁王이 즉위한다. 光仁天皇이다.
光仁天皇 즉위후、井上内親王를 皇后로、他戸親王을 皇太子로 세웠지만、
宝亀3年(772年)3月2日、皇后인 井上内親王이 저주를 하여 大逆을 꾀했다는 密告에 의해 皇后를 폐하고,
또、皇太子인 他戸親王도 皇太子를 폐하였다.
그후 、宝亀4年(773年)10月19日、죽은 難波内親王(光仁天皇의 同母姉)의 살해를 저주했다고 하는 혐의를 씌워、他戸親王과 함께 庶人으로 강등시켜 大和国 宇智郡(奈良県 五條市)의 집에 幽閉시킨다.
그리고、幽閉지에서 他戸親王과 같은 날 죽게 된다(殺害되었다)
斎王井上内親王의 슬픈 이야기이다.
한편、宝亀4年(773年)、光仁天皇의 第1皇子 山部親王(白壁王과 百済 귀화인의 자손인 高野新笠의 아들)이 立太子 된다.
天応元年(781年)에 光仁天皇으로부터 양위받아 天皇에 즉위한다. 桓武天皇이다.
이렇게하여、49代 光仁天皇과 50代 桓武天皇으로、天智天皇 적통의 皇統이 부활했던 것이다.
延暦 13年(794年)、桓武天皇은、天武皇統에 의해 반복된 政変에 의한 粛清、비대해진 仏教寺院 세력을 싫어하여、平城京을 버리고、平安京으로 천도했다.
그 京都市 東山区에 皇室의 菩提寺인 泉涌寺(御寺)가 세워진다.
그 霊明殿은、天智天皇과 光仁天皇으로부터(南北両朝의 天皇도 포함하여)昭和天皇에 이르기까지 歴代天皇 ・皇后의 尊牌(位牌)를 安置했다. 거기에는、天武系 皇統의 8명의 天皇(天武、持統、文武、元明、元正、聖武、孝謙、淳仁)의 位牌는 제외되고、天智로부터 갑자기
光仁, 桓武에로 이어지는 것이다. 邪馬台国系 皇統만이 제사지내는 것이다.
(저자는 천지천황을 邪馬台国系 황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계 황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의견이 갈린다)
『紀』를 改竄하여 大海人과 中大兄皇子를 兄弟로 만들어 올린 것은 藤原不比等이다. 그러나、현실은 藤原不比等의 改竄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말았던 것이다. 泉涌寺에는 狗奴国系 皇統의 位牌는 없다. 飛鳥 ・ 奈良朝의 朝廷의 관리는、 歴史(皇統의 変遷)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記紀編纂을 発案했던 天武天皇은 狗奴国 혈통 최후의 光芒이었던 것이다.
猿女君이 암송(誦)으로 전해졌던 고대 일본의 왕통의 交代劇은 이야기한다。
邪馬台国 왕통과 狗奴国 왕통이라고 하는 2개의 서로 다른 왕통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相克하기도 하고 交代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邪馬台国 왕통의 卑弥呼는 伊都国을、狗奴国 왕통의 卑弥弓呼는 奴国을 각각 本貫으로 했다. 伊都国도 奴国도 倭奴国(나고쿠)가 내부 분열하여 태어난 나라이다. 그리하여、邪馬台国 왕통과 狗奴国 왕통은 同根이며、그 기원은「漢委奴國王」金印에 나타났던 倭奴国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本稿는、理系学者인 宮﨑照雄가 찾아낸、日本 고대사의 실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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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unakoku.info/sub-08/sub-08-01.html 에서 발췌 편집한 내용입니다.
저자는 天智天皇을 邪馬台国계 왕통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백제계 부여풍왕자, 또는 부여교기 왕자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