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原始国家로부터 専制国家에로 (1)
原始国家로부터 専制国家에로(1)
1.継体天皇 崩御의 수수께끼
継体天皇 25年、天皇은 磐余 玉穂宮에서 崩御했다고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天皇의 崩御年에 대해서는、『記紀』간에 모순이 생기고 있지만, 継体의 경우는 더욱더 異説이 있다. 이것에 『安閑紀』를 더하여, 『上宮聖徳法王帝説』등의 欽明天皇 치세년수로부터 본 즉위년을 합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①『継体記』 「継体天皇은 43歳였다. 丁未年 4月 9日에 죽었다(丁未年은 527年)
御陵은 三嶋의 藍之御陵이다.」
②『継体紀』 「25年 辛亥年(531)春 2月丁未、天皇은 磐余의 玉穂宮에서 崩御했다. 당시 82세였다」
③『継体紀』引用의 『百済本記』「어떤 책에 의하면、天皇은 28年에 崩御했다고 한다.
그것을 여기에 25年 崩御했다고 하는것은、 百済本記에 의하여 記事를 썼기 때문이다. 그 文에 말하기를『辛亥年
3月、 진군하여 安羅에 도착하여、乞屯城을 만들었다. 이달에 高麗는 그 王、安을 弑害했다. 또 들리는바에
의하면,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가 모두 죽고 말았다』
여기에 의하여 말하면 辛亥年은 25年에 해당한다. 後世、알아볼 사람이 명확히 할것이다」
④『安閑紀』 25年 春 2月7日、継体天皇은 大兄을 天皇으로 세우고, 그날에 崩御했다.
元年(甲寅年、534年)春 1月、都를 倭国의 勾의 金橋로 옮겼다. 따라서 이것을 宮의 이름으로 했다.
⑤『上宮聖徳法王帝説』 欽明天皇이 天下를 다스리기 41年.
이것으로부터、継体의 崩御年은『古事記』에 의하면 527年、어떤 책은 534年 『百済本記』느 531年의
3 説이 있게된다.
『日本書紀』는『百済本記』説을 채용하면서,『安閑紀』에서의 即位年은『百済本記』 로부터, 元年은 “어떤 책”의 説을 그대로 記載한다고 하고, 얼토당토 않은 것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問題는『上宮聖徳法王帝説』이다.
『日本書紀』는 欽明의 即位를、己未年(539年)으로 하여、571年(辛卯年)에 죽었다고 하고 있다.
欽明의 崩御年이 571年인 것은、여러 책이 일치하고 있으므로、『上宮聖徳法王帝説』의 治世 41年(法王帝説은 即位年을 第 1年으로 하기때문에 実年数는 40年間)을 逆算하면、欽明즉위는531年이 된다.
531年은 継体의 没年으로、이것에 의하면 安閑 ・宣化 2천황의 재위기간이 없어지게 되어, 継体 没後、欽明이 즉위 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上宮聖徳法王帝説』이 틀렸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以下에 明治38年 발표의、平子鐸嶺氏의 説을 소개한다.
「百済의 聖明王이 仏像과 経論을 大和朝廷에 보내온 해를、日本書紀는 欽明天皇 13年(552년)설을 취하나、
奈良時代 末 이전에 완성된 책에서는 모두 戊午年(538년)説을 취하고 있다.
(예를들면、法王帝説에는 欽明天皇의 御世의 戊午年(538년)으로 하여、
『元興寺縁起』그 외에서는 欽明 第7年 戊午年(538년)으로 으로하고 있다)
이것은、538年(戊午)説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혹시 日本書紀와 같이 欽明天皇의 즉위년이 539 년이라고 한다면, 그에 따라, 1년전이『欽明天皇의 御世』라고 말할수가 없지 않는가?
이것에 反하여, 法王帝説과 같이, 欽明의 즉위년이 531년이라면, 불교전래는 확실히 『欽明天皇의 御世』가 되고, 또 538년은 바로 『欽明 第7年』이 되기때문이다」
平子氏의 説을 따른、『上宮聖徳法王帝説』이 옳다고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이 증명에 따라, 安閑朝와 欽明朝의 2朝가 並立했던 상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유력한 説도 있다.
이 説을 간단히 설명하면、
継体没後 1년간 空位의 기간을 보낸후에, 安閑이 즉위하여, 翌年 70歳로 죽었는데, 1년의 空位라는 異常事態가 있었던 이유는, 継体没後、欽明이 즉위하였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호족그룹이 1년후에 継体의 여러 아들중에 가장 연장자였던 安閑을 즉위시킴으로써
二朝並立, 왕권 분립시대로 돌입했다. 安閑没後、宣化를 옹립하였는데 4년후 宣化가 죽자 왕권은 欽明에게 일원화되었다는 것이다 (『日本書紀』)
그러나、『安閑紀』에는 東은 関東으로부터 西는 九州에 이르기까지, 諸国에 屯倉이 증설되어,『日本書紀』에는 무려 41개의 屯倉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다. 또 屯倉설치에 대한 説話가 몇개 전해오고 있다.
이 屯倉설치의 기록을 그대로 다 신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武光誠氏는, 『別冊歴史読本』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최근、安閑朝부터 宣化朝에 걸쳐 大和朝廷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二朝並立의 混乱 가운데서 그러한 발전이 있었다고 보지 않는 편이 보다 타당하므로 継体天皇으로부터 欽明天皇까지의 皇位의 계승은 평화로운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別冊歴史読本「歴史의 謎 시리즈6」継体天皇)
安閑과 欽明에서는、그 핏줄로부터 말하면, 「手白香皇后」를 母로 하는、欽明의 쪽이 보다 相応하는 것이 된다.
二朝並立에 反對하는 派는 이점을 중시하여、継体崩御後의 天皇은 본래 欽明이 즉위하게 되어 있는데, 나이가 어려서, 尾張「目子媛」를 母로 가진 安閑・宣化가 연속 즉위했다가, 성년이 되는 것을 기다려 欽明이 즉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日本書紀』가 그렇게 記述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二朝並立説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단 、欽明 즉위의 배경에는 裏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継体崩御後에 、安閑・宣化라고 하는 尾張系의 天皇이 즉위했지만, 어떤 이유에 의하여 본래의 皇統이던、「市辺押磐皇子」(私見으로 말하면「押磐天皇」)系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손수 譲位를 암시하던 「弘計」(顕宗天皇)은、「大伴金村連」에게 차기정권을 맡겼다.
이러한 것이、継体옹립과 연결되어 있지만, 皇統을 유지하기 위하여、皇后는 押磐天皇의 皇女로부터라고 하는 조건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8부에서 추리했던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듯이,
継体의 皇后「手白香皇女」、
安閑의 皇后「春日山田皇女」、
宣化의 皇后「橘仲皇女」의 3妃는 모두 押磐天皇의 皇子、仁賢天皇의 皇女인 것이다.
그렇지만, 欽明에 이르러서는 입장이 역전되고 있다.
欽明은 押磐天皇系이며, 皇后의「石姫」는 宣化의 皇女이므로、「近越・尾張」系이다.
본래라면, 宣化崩御後、宣化의 皇子「上殖葉皇子」(카미츠우에하노미코)가 뒤를 잇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宣化의 皇子에 의한 세습이 되지 못하고 만다(이유는 후술함)
거기서 押磐天皇系의 欽明天皇을 즉위시켜, 宣化의 皇女를 皇后로 하여, 皇統의 유지를 꾀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継体 옹립의 때와는 전적으로 逆의 입장이다.
이러한 추리가 성립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上宮聖徳法王帝説』으로부터 본、531年 欽明즉위설이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는 것『安閑紀』・『宣化紀』에 구체적인 事績이 記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継体紀』에 인용되어 있는『百済本紀』의 친숙한 一文으로부터이다.
「辛亥年 3月、進軍하여 安羅에 도착하여、乞屯城을 만들었다. 이 달에 高麗는 그 王、安을 弑害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 모두 죽고 말았다」
이 一文은、『継体紀』에 記述되어있는 것으로、継体에 관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宣化의 사실이지 않을까? 皇太子라고 하는 자는、「上殖葉皇子」일 것이다.
辛亥年(531)에、宣化와 皇太子가 죽어버렸기때문에, 押磐天皇系의 皇子가 欽明으로서 즉위한 것이다.
가령, 이 記述이 継体에 관한 것이라면, 天皇과 마찬가지로 죽어버린 皇太子가、安閑으로서 즉위하고、또한 죽었어야 할 皇子까지도 宣化로서 즉위한 것이 된다.
蛇足이지만、『日本書紀』의 편찬자는、분명하게 모순되는 설화를 인용 삽입하여 두면서도、매우 간단히 스토리를 진행시켜 가지만, 이러한 자세는、이해하기 매우 힘들지만,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그점이 재미가 있다.
그 외에도 一読하여 거짓으로 판명되는 記述이 몇번이고 마주치지만, 그 중에는 일부러 그렇게 記述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도 있다.
일국의 역사서가, 편찬직후부터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할수는 없으므로, 편찬후 새로썼다라고밖에는 생각할수 없다. 결국, 모순이 생기는 것보다 새로 쓰는 쪽이 중요했던 것이 된다.
欽明은、継体의 다음代의 天皇으로서 정당한 핏줄이었는데, 왜인지 立太子하지 않았다. 이때는 나이가 어렸다고 하는 것도 좋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宣化의 代가 되어서도 立太子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생각컨대, 이때 이미、「上殖葉皇子」가 立太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宣化에게、「上殖葉皇子」라고 하는 皇子(皇太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欽明이 즉위한 것은、『日本書紀』에 말하는、후사가 끊겼기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될것이다.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모두 죽고 말았다」였기 때문이다.
「모두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평온하지 않기때문에、혹은 記録으로 남길수 없는、暗殺비슷한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継体崩御後、母系로부터 보면,
安閑・宣化와 「尾張」의 「目子媛」의 피를 받은 天皇이 즉위하여,
531年、宣化、「上殖葉皇太子」가 함께 죽음으로써 후사가 끊기게 되고,
「手白香皇后」의 피를 받은 欽明이 즉위하게 된것이다.
特筆할 것은, 前述한대로 安閑・宣化・欽明의 3대는、継体의 자식이라는 것, 安閑・宣化의 正妃는 仁賢의 娘이고、欽明의 正妃는 宣化의 娘이라고 하는 것이다.
仁賢은 押磐天皇의 皇子이다. 또 継体의 正妃「手白香皇后」도 仁賢의 皇女였다.
결국, 継体・安閑・宣化・欽明의 4대는、본래의 皇統과 雄略의 後、 継体를 옹립했던 새로운 皇統과를、무언가 일체화시킬려고 하는 노력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확실히、旧야마토 세력이 되고 말았던 仁賢의 측근들은、「大伴氏」의 정책에 추종할수 없었고, 20年도 넘게 오랫동안 「大和」를 점령하거나、혹은 「磐井의 乱」에 가담하게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天皇家(大王家)를 통하여、皇統의 유지에 노력하는 것 같다. 이러한 가운데서 二朝並立상태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欽明의 즉위년이、『上宮聖徳法王帝説』에 따라 531年이라고 밝혀진 이상, 安閑・宣化의 両天皇은 그 이전에 즉위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2.日本書紀 撰修의 수수께끼
「어떤 책에 의하면,
第1을 茨城皇子라고 한다.
第2를 泥部穴穂部皇女라고 한다.
第3을 泥部穴穂部皇子라고 한다. 또 다른 이름은 住迹皇子。
第4를 葛城皇子라고 한다.
第5를 泊瀬部皇子라고 한다.
또 어떤 책에는、
第1을 葛城皇子라고 한다.
第2를 住迹皇子라고 한다.
第3을 泥部穴穂部皇女라고 한다.
第4를 泥部穴穂部皇子라고 한다.
第5를 泊瀬部皇子라고 한다.
帝王本紀에 대단히 많은 오래된 이름이 있고, 撰集하는 사람도 종종 뒤바뀌는 수도 있었다.
후세사람들이 배워읽을때, 뜻대로 수정했다. 베끼는 것도 많았고, 뒤섞이는 것도 많았다.
前後의 순서를 잃고, 兄弟도 뒤섞이고 있다.
지금、古今의 생각을 조사하여, 진실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용이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임시로 한쪽을 택하여, 다른 의견을 註記했다.
다른 곳도 이것과 마찬가지이다」
上記 一文은、『欽明紀』2年春 3月의 条의 뒤에 記述되어있는 각주이다.
『帝王本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대단히 흥미깊다고 말할수 있지만, 『欽明紀』는、『日本書紀』全30巻中의 巻第19에 해당한다.
왜 이런 一文을 다루었느냐고 하면, 이 文의 後半에 해당하는
「帝王本紀에、대단히 많은 오래된 이름이 있고・・」
이후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내용이 내보이는 記述은、『神代紀』로부터 『継体紀』에 이르기까지、몇번이나 있었다.
그렇지만, 「前後의 순서를 잃고・・」라고 하는 記述은、여기 『欽明紀』가 처음이라고 할만하다. 따라서 여기까지 『日本書紀』를 읽어 왔던 독자들에게는, 무엇을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하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본래 이러한 記載는、巻頭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半도 진작에 벌써 지난 巻第19에 있는 의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巻頭에 있어야만 할 각주가、巻第19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巻第19 『欽明紀』야말로 원래는 巻頭였다고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리고、天武 10年3月17日에 있다.
「天皇은 大極殿에 가시어、川嶋皇子・忍壁皇子・広瀬王・竹田王・桑田王・三野王・大錦下上毛野三千・小錦中忌部連首・小錦下阿曇連稲城・難波連大形・大山上中臣平群臣子首에게 말하여、帝紀 및 上古의 諸事를 적어 校定시켰다. 大嶋・小首가 몸소 筆을 들어 기록했다。」
이 記述이、『日本書紀』撰修事業의 開始였다고 한다면、天武天皇의 代에 編纂이 끝났다고 하는 부분은, 『欽明紀』부터 『天武紀』까지이며, 『持統紀』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天武朝에 있어서『持統紀』는、미래의 이야기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또、天武의 死亡이나 『帝紀 및 上古의 諸事』(通説로는『日本書紀』)撰修事業의 開始를 記述하는、巻第29 『天武紀』下巻도 같은 이유로 포함되지 않는다.
『天武紀』는、「壬申의 乱」의 승리까지를 記述하는 巻第28의 上巻과、天武 즉위로부터의 巻第29의 下巻으로 나뉘어 記述되어 있지만、上巻에 해당하는 1巻이 완성되었기때문에, 다음 代에 下巻으로 부가시켰던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日本書紀』(실제 이때의 책의 명칭은 모르지만)는『欽明紀』를 巻第1로 하여, 『天武紀』上巻을 巻第10으로 하는, 全10巻(以下 10巻本)을 天武가 撰修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단, 현재에 전하는 『10巻本』이 당시 그대로라고는 생각할수 없다.
天武의 命으로、자신에게 불리한 記述은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상한 箇所도 적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기보다 모순투성이이다.
앞에서 고쳐썼을 가능성도 말한 것은, 이것때문이다.
『天武紀』上巻이 巻末이라고하면、『10 巻本』의 撰修목적은 저절로 확실해진다.
그것은、「壬申의 乱」에 의한 王朝転覆의 정당화이다.
『欽明紀』부터 『天智紀』까지의 『10巻本』가운데 9巻은、「壬申의 乱」의 프로로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過言인가? 실은 그렇다고도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또 『欽明紀』가、『10巻本』의 巻第1 이 아니면 안되었던 이유도 판명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프로치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으로서、『天武紀』부터 『欽明紀』까지의 거꾸로 읽기이다. 거꾸로 읽기라고 해도, 그 계보를 거꾸로 더듬어 가는 것만이지만. 이것에 의하여, 先代와의 연결이 알기쉽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天武라고 해도, 어쩐지 万世一系에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같다.
이것들은、「唐」에 대한 허영심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할수 있다.
孝徳朝는、 확실히 畿内二朝 상태였지만, 『10巻本』은 동시에 존재했던 大王(天皇)을 直系로 記述하고 있다.
『10巻本』은、孝徳朝시대는 二朝併立이었던 사실을、확실히 말하고 있음에도 상관없이.
그것은、大化2年 3月20日、「中大兄皇子」가 天皇에게 사자를 보내, 奏上했을때의 記述에 있다
약간 길지만、『日本書紀』로부터 그 부분을 인용하여, 현대어로 번역하면,
「『옛날의 天皇들의 代에는、天下는 혼연일체가되어 다스려져 왔지만, 지금은 너무 나뉘어 떨어져서、나라의 일이 행하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天皇도 우리皇도、万民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天도 사람도 상응하여, 그 政이 새로이 되어 왔습니다. 삼가 축하의 말씀을 올립니다.
現 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이、나에게 물었습니다.
『群臣・連・및 伴造・国造가 소유하는 옛날의 天皇의 시대에 두었던 子代入部、 皇子이름이 들어간 私民、
皇祖大兄(彦人大兄을 말함)의 이름이 들어간 部와 그 屯倉등을、옛날 그대로 둘것인가 어떨것인가』라는 질문을 삼가 듣게되어, 『하늘에 2개의 해가 없듯이, 나라에 2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천하를 하나로 정리하여, 万民을 심부름꾼으로 하는 것은 오직 천황뿐입니다. 특별히 入部와 食封의 民을 国의 仕丁으로 돌리는 것은、앞에서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私用으로 부리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므로 入部는 524口、屯倉은 181所을 헌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쓰드렸다』고 했다」
어쨋건 납득할수 있기까지 잘 읽어보시기를...
이 奏上은 『孝徳紀』에 있는 것으로서、「中大兄皇子」부터 孝徳天皇에 대한 것으로 생각되어 지지만, 天下는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이 대화가운데 등장하는 인물은、「中大兄皇子」외에 아래의 3명의 이름이 있다.
「天皇」
「우리皇」
「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
이 3개의 이름이 동일인물, 즉 孝徳을 표현하고 있다면, 문제로 할 필요가 없지만, 모두가 孝徳이라고 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읽는다고 해도, 아무리해도 孝徳 1人이라고는 이해할수 없다는 것이다.
「天皇」과「우리皇」은 분명히 다른 인물이다.「天皇」을 孝徳天皇이라고 한다면, 「中大兄皇子」를 가리켜「我が皇」이라고 하는 것은、도대체 누구인가?
「中大兄皇子」의 때 天皇이라고 하면、孝徳이나 皇極天皇(중첩하여 斉明天皇)이 된다.
孝徳이 아니라면, 해당자는 皇極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日本書紀』는、皇極이 중첩하여 斉明天皇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으로부터 실제로는 중첩한 것이 아니고 연속하여 천황이 되었으므로, 同時期에 孝徳을 즉위시킨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분명히 二朝併立상태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이라고 하는 것은、어느쪽 天皇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 인물이 「天皇」인지「우리皇」인지 어느쪽이냐고 묻는다면, 어느쪽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라고 하는 것은、이 奏上자체는 孝徳에게 보내어 진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天皇」과 「우리皇」을 앞에한 「中大兄皇子」가 、일찌기 「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과 나누었던 会話를、両 天皇에게 전했다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中大兄皇子」와 동시대에、「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도 존재하고 있은 것이지만, 「天皇」이나「우리皇」시대와는 시간차가 있은 것으로 생각한다.
「現為神明神御八嶋国天皇」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밖에 말할수 없지만, 天皇이라고 호칭되고 있기때문에 당시 최고권력자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天智天皇과 天武의 관계이지만, 『日本書紀』에 의하면 天武인 「大海人皇子」는 皇太弟라고 하고 있어 문자대로 天智의 동생인것 같지만, 불가사의하게도 天武의 쪽이 兄이었다고 하는 説이 있다.
天智의 崩御年은 671年이다. 이때 年齢은 『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기를, 舒明崩御때 天智의 연령이 16歳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30년 후에 죽었으므로 享年 46歳 가 될것이다.
한편 天武는、『日本書紀』로부터도 아무것도 알수 없지만, 室町時代에 편찬된 『本朝皇胤紹運録』에 의하면, 65歳에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686年에 해당한다.
舒明의 崩御年은 641年이므로、舒明의 崩御年에 天武가 몇살이었는지 逆算해보면,
「天武崩御 65歳-(天武崩御年686-舒明崩御年641)= 20」이 되어,
天智16歳때 天武는 20歳가 되고 만다.
皇太弟였다고 하는 天武가、실제로는 연장자였을런지도 모른다. 天武쪽이 연장자라면、天智보다도 먼저 즉위할 권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中大兄皇子」가 38代 天智天皇으로 즉위했기때문에 이것으로는, 皇位継承순위가 무시된 것이 아닌가?
이것보다 과거에 있어서도, 생존중인 형을 제치고 동생이 즉위했다는 기록은 없다.
天智만이 예외라고 한다면 그뿐이지만, 여기서는 皇位 계승순위를 무시할수 있는 밀약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中大兄皇子」는 皇極朝의 皇太子였다. 그러나 、「大海人皇子」는 皇太弟등이 아니고, 併立하여 존재하고 있던、孝徳朝의 皇位 계승자가 아니었을까? 王朝가 다르다면, 年長・年少의 사실은 관계가 없다.
물론、이 両者는 실은 형제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런데, 皇極의 先代의 天皇이라고 하면 舒明이고、以下、推古、崇峻、用明、敏達、欽明의 順으로 오래되어 간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皇統일런지 모르는 孝徳이지만、孝徳의 즉위는、「乙巳의 変」(大化改新)과 밀접한 관계로 記述되어 있다.
「乙巳의 変」에 의하여、皇極은 퇴위하여 「軽皇子」(孝徳天皇)에게 譲位했다고 하지만, 孝徳은 皇極과 併立하여 있었으므로、그 先代는 皇極에 연결될수가 없다.
결국, 孝徳의 즉위는 皇極의 譲位에 의한 것이 아니다. 孝徳 즉위의 직접적인 이유가 「乙巳의 変」이라면、살해당한 「蘇我入鹿」大臣이야말로、孝徳의 先代가 되지 않는가?
악명높은 「蘇我氏」3代、「馬子・蝦夷・入鹿」은、또 하나의 皇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臣下인 주제에、天皇이상의 행동거지로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악행들, 사실 천황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二朝 併立의 비밀은 『推古紀』주위에 감추어져 있는 기분이 든다.
6世紀 末、최초의 女帝였던 推古天皇이 즉위하여, 그 아래「厩戸皇子」(우마야도노미코)와 「蘇我馬子」에 의한 共同執政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隋書 倭国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開皇20年、倭王이 있었는데、姓은 阿海、字는 多利思比弧」
開皇 20年이라면、推古天皇 8年(600年)이다.「阿海多利思比弧」는、「아메다리시히코」라고 읽히는「天足彦」일 것이다. 물론 남성천황의 敬称이다.
이것에 의하면, 推古시대의 倭王은、남성이었던 것이 된다. 誤記나 거짓記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隋」로부터 보아 단순한 外国에 불과한「倭国」에 대하여、거짓 記録을 남길 메릿트를 찾아낼수 없기때문이다.
『隋書』의 기록은 진실임에 틀림없고, 推古朝와는 다른 男性天皇이 즉위했던 王朝가 있었던 것일까?
그러면, 推古의 先代、崇峻天皇이 「蘇我馬子」에게 속아 살해당했다고 하는 『日本書紀』의 記述이 마음에 걸리는 곳이다.
또 『日本書紀』는、『欽明紀』로부터 仏教전래에 기인하여 「物部氏」와 「蘇我氏」의 不仲을 기록하여, 『崇峻紀』의 종교전쟁으로 결말을 짓고 있지만, 이것조차도 무관계하다고 말할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있는 최대급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론은 보이지 않는다. 그 수수께끼는、飛鳥의 聖者・「聖徳太子」이다.
3.聖徳太子는 누구인가?
宣化의 때、「蘇我稲目宿根」가 大臣에 임명되었다. 이 이후로 「蘇我氏」는 융성하여 「馬子」・「蝦夷」・「入鹿」의 3代가 最盛期 였다고 한다.
그리고、「蘇我馬子宿根」가 大臣일때、推古朝에서의 摂政이「聖徳太子」이다.
用明天皇과「穴穂部間人皇子」(아나호베노 하시히토노 히메미코)의 第1子이며、「厩戸皇子」가 본명인 것 같지만 또다른 이름을 「豊耳聡聖徳」(토요토미 미시요우토쿠)、혹은「豊聡耳法大王」(토요토미 미노노리노 오오미키)、「法主王」(노리노우시노 오오키미)등인것 같다.
「聖徳太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冠位12階의 制定」・「憲法17条」등、누구나 알수있는「太子」이지만, 그 인물상은 聖者이었다는 정도로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바로、수수께끼의 인물인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聖徳太子」이지만、「太子」의 존재를 말살해버리는 記述이、『日本書紀』에 적혀 있으므로 더욱더 놀라게 되고만다.
그것은 巻第22의 『推古紀』冒頭의 부분이다.
「豊御食炊屋姫天皇은 欽明天皇의 第2女로서、用明天皇의 同母妹이다.
어릴때는 額田部皇女라고 불리었다. 容色단정하고 立居태도도 실수가 없었다.
18歳때、敏達天皇의 皇后로 되었다. 34歳때、敏達天皇이 崩御하였다.
39歳、崇峻天皇 5年11月、崇峻天皇은 大臣 馬子宿根때문에 弑害되어、皇位가 비게 되었다.
群臣은 敏達天皇의 皇后였던 額田部皇女가 皇位에 오르도록 청했지만, 皇位는 辞退되었다.
百官이 上表文을 바쳐서 더욱더 추천하였기때문에、3번째에 이르러 、드디어 따르게 되었다.
거기서, 皇位의 印인 鏡・剣등을 바쳐서、冬12月8日、皇后는 豊浦宮에서 즉위했다」
라고 되어있지만, 敏達의 治世는14年間이며、「額田部皇女」를 皇后로 맞이 한 것은 敏達5年이다. 이때「額田部皇女」는18歳였으므로、敏達崩御의 때는、27歳나 28歳였을 것이다.
이것조차 문제이지만, 더욱더 문제인 것은「額田部皇女」가 39歳일때 이다.
이때는 崇峻天皇 5년이라고 한다.
「額田部皇女」의 연령으로부터 逆算하면、敏達崩御로부터 崇峻崩御 까지도 5년간이다.
그렇다고 하면, 敏達・崇峻사이에 즉위한 、用明의 在位 2年(혹은 3年)의 여지가 없게되고 마는 것이다.
「額田部皇女」는39歳에 推古로서 즉위하여、75歳에 崩御했다고 한다. 崩御는 推古 36年3月7日이므로、계산은 틀리지 않고、『推古紀』를 통하여 연대의 오류는 없다고 推察할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用明은 이름뿐이고 在位는 없었던 것이 된다. 在位가 없는 천황의 『天皇紀』등 捏造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用明등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것을 증명하는 記述이、『崇峻紀』에 보인다. 崇峻天皇 4年에 敏達을 葬事지냈다는 것이다.敏達의 葬儀를 用明 代에 행하지 않고、2代後인 崇峻 代에 행했다고 하는 記述은、아무리 생각해도 異常한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用明紀』에는、「須加手姫皇子」(수카데히메미코)를 「伊勢神宮」의 斎宮으로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그것에 계속되는 각주에,
「이 皇女는、이 天皇의 때부터、推古天皇 代까지、皇大神宮에 모셔져, 後年 母의 고향、葛城에 물러나 죽었다라고 推古天皇紀에 보인다」
라고 하지만, 이 각주에 대응하는 記事가 『推古紀』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用明을 葬事지낸것은、2代後의 推古 代이며、여기에서도 崇峻을 날려보내고 있다.
그 崇峻이라고 하면、아무리 暗殺당했다고 해도、그날중으로 葬事지냈다고 하는 것도 異常하지 않는가? 貴人의 葬儀는 殯의 儀를 행하여、3年後 葬事지내는 것이、『隋書倭国伝』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한 記述의 이면에는、반드시 조작이 감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말하면, 조작이 있었기때문에, 이상한 記述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用明紀』・『崇峻紀』・『推古紀』는、원래의 『10巻本』을 대폭 改竄했거나、記事를 捏造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전체의 사리를 합쳐본 후에, 재편집한 결과의 일부가, 세대를 넘어서 敏達이나 用明을 葬事지냈다는 記事이고、『推古紀』에는 보이지 않는「須加手姫皇子」일 것이다. 그러한 것은 용이하게 改竄했다는 것을 알수 있을 정도로 、矛盾에 차있다.
그리고 『10巻本』가운데서、다른 天皇紀가 독립해서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用明紀』・『崇峻紀』만이 合編인 이유도 대강 推察할수 있다.
이러한 것은『十巻本』을 편찬한후, 天武의 死後에 행해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天武에게 유리하게 記述、編纂되었을 『十巻本』에、天武의 意志에 의하여 捏造・改竄가 행해진 것은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用明紀』・『崇峻紀』・『推古紀』는、어떤 공통하는 테마를 記述하고 있다.
그것은、飛鳥의 聖者・「聖徳太子」이다.
『用明紀』에서는、用明天皇과「穴穂部間人皇女」의 아들이라고 하는、皇室가운데서도 엘리트중의 엘리트라고 하는 위치가 매겨지고, 『崇峻紀』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聖者였다고 하는 이미지가 그려지고,
『推古紀』에서는, 『聖徳太子紀』라고 해도 지장이 없을듯한 太子摂生의 모습과 聖者로서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用明이 実在가 아니라면, 「太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에 따라, 「太子」라고 하는 것은、『日本書紀』에 의하여 창조된 인물상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太子」의 実在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後代의 文献에도 인정되는 바와 같이, 聖徳이라던가 法大王이라고 불리는 인물은 実在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결국、720年 당시의 天皇家에 있어서、전승되고 있는「厩戸皇子」가 본래의 인물인채로는
대단히 부적합한 존재였기 때문에 다른 인물상을 창조하여 태자로 한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私見으로는、『隋書倭国伝』에 記述되어 있는、倭王「阿海多利思比弧」는 「太子」이다.
그러나、「太子」는 실제로는 天皇이었다고 하는 説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日本書紀』는 그 시대를 推古의 治世로 하고 있다. 歴史書인 이상, 읽혀지는 것이 대전제일 것이다. 편찬이 종료되고 나서 겨우 100년 정도 전에 지나지 않은 시대의 천황이 여성이었는지 남성이었는지 정도도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성천황을 女帝로 썼다고는 생각할수 없다.
따라서、推古가 아니었을런지 모르지만, 확실히 女帝의 시대였던 것이다.
「聖徳太子」는 天皇이었을 리가 없다. 단지 皇太子摂政이었던 것은 틀림없고、또한 大王이었던 것이다.
(大王=天皇이 아닌가?라고 힐책하겠지만 결론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잠시 대기하도록..)
그런데、『用明紀』・『崇峻紀』・『推古紀』는、더욱더 또 하나의 테마를 올리고 있다.
그것은、극악무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하는 「蘇我氏」3代의 전횡시대이며, 『崇峻紀』에 기록되어 있는바와 같이、崇峻을 암살한 「蘇我馬子」부터 시작하여, 「蘇我氏」3代의 극악무도한 태도가 발휘되는 것이다.
대개、『崇峻紀』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蘇我馬子」는 「太子」의 叔父이던 崇峻을 죽이고, 「太子」는 그 殺人犯과 함께 政務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되고, 또한「太子」는、叔父를 살해한 자의 娘「刀自古郎女」(도지고노이랏쓰메)를 妃로 하고 있던 것이 된다.
아무리 聖者라고 해도 절대로 있을수 없는 것이다.
奈良時代에 들어가면, 仏教문화가 최고조에 달하지만, 그 불교는 「蘇我稲目」에의해 갸져와서 、「蘇我馬子」에 의하여 개화한 것이다. 『日本書紀』의 記述대로 「蘇我氏」가 대악인이었다면, 그들이 도입한 불교가、国内를 뒤흔들정도로 센세이셔널한 것일리가 없다. 하물며 天皇조차도 귀의하고 있는 것이다.
「蘇我氏」또한 창조된 인물상인 것이다.
그렇다면、飛鳥의 성자・聖徳太子와 大悪人「蘇我氏」라고 하는 인물상이 만들어진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天武天皇의 発案에 의하여 『帝紀 및 上古의 諸事』撰修事業을 이용하여, 그 내용을 『日本書紀』성립당시(720年)의 天皇家에、형편좋게 고쳐서 편찬할 목적때문이었다고 라고 밖에는 생각할수 없다.
이 당시의 사정은 아래와 같이 추리할수 있다.
「壬申의 乱에 의하여 近江朝를 무너뜨리고 즉위했던、蘇我系였던 天武天皇은、 바로 征服王朝였다. 그리고、壬申의 乱을 정당화하기 위한 大義名分을, 「蘇我入鹿」暗殺이라고 하는 乙巳의 変(大化改新)에서 구하여、『10巻本』을 편찬시켰다.
그렇지만、天智朝(혹은 皇極朝)도 또한、乙巳의 変에 의한 征服王朝였던 것이다.
天武의 死後、皇位를 이어간 天智의 妹・持統天皇이나、또 그것을 상속한 元正天皇은、乙巳의 変의 大義名分을、『蘇我氏』三代와 聖者・聖徳太子에게서 구했다.
즉, 崇峻天皇을 죽이고、聖徳太子를 죽음으로 몰고가서、그 아들「山背大兄王」(야마시로노 오오에노미코)以下、上宮家를 모두 죽인 것은 『蘇我氏』였다고 하는 기록을 날조하여、『10巻本』을 利用改竄하여『日本紀』(『日本書紀』)를 성립시킨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藤原不比等』가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推古紀』는、『十巻本』에서는、『厩戸皇太子紀』였을 가능성이 높다. 聖徳太子 摂政을、推古天皇代에 바꿔치기 한 것이다.
슬슬 수수께끼를 풀어보면,
먼저 第1은 、『日本書紀』에서 聖徳太子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이다.
실은, 무서울정도로 전적으로 설득력 있는 説이 존재한다.
関祐二氏는 著書『聖徳太子는 蘇我入鹿이다』라고 하는、쇼킹한 타이틀 가운데에서、『先代旧事本紀』・『元興寺縁起帳』・『日本書紀』를 조합하여, 어떤 系譜를 도출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元興寺縁起帳』
?──────大々王(物部氏 出身) ?────── 巷奇有明子(蘇我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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聡耳皇子(大王・元興寺를 만들다) 善徳<長子>(元興寺를 세우다)
『日本書紀』
蘇我馬子──────物部守屋의 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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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徳(元興寺의 初代管長)
『先代旧事本紀』
宗我嶋大臣─────物部鎌姫大刀自連公
(蘇我馬子)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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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浦大臣、名을 入鹿
이러한 系譜를 조합하여 보면, 「蘇我馬子」와 「物部守屋」의 妹인 「物部鎌姫大刀自連公」과의 사이에 난 아들이야말로「聖徳太子」이며、「蘇我入鹿」과는 異名胴体의 관계가 되어, 그의 본명은 「善徳」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이 説은 수없이 많은 諸説 가운데서 무서울 정도로 설득력을 가진, 文献史의 私的解析의 아프로치 방법이 같기때문에 같은 결론이 된다. 단지 단 한가지를 뺐다고 하는 조건부이지만...
聖徳太子는「蘇我氏」의 血縁者로서 記述되어 있다. 그것도 蘇我系 皇族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蘇我氏」의 피가 짙다.
飛鳥의 聖者・「聖徳太子」로서 기록되어 있으면서、大悪人「蘇我氏」의 피가 짙은 것등, 아무래도 창조된 인물상이기때문에、더욱더 聖者다운 血縁으로 해도 좋았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記述은 진실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太子」는「蘇我 厩戸皇子」라고도 말할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蘇我氏」3代에 대해서이다.
『隋書倭国伝』은、
「内官에 12等級이 있어、1을 大徳으로 하고、다음은 小徳、그다음은 大仁、다음은 小仁、
다음은 大義、다음은 小義、다음은 大礼、다음은 小礼、다음은 大智、다음은 小智、다음은 大信、다음은 小信、員에 定数없음.」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序列이야말로 약간 틀리기는 하지만, 「太子」가 시공했던 『冠位12階』(大徳、小徳、大仁、小仁、大礼、小礼、大信、小信、大義、小義、大智、小智)에 틀림없다.
推古12年1月1日、이 12階의 冠位를 諸臣에게 주었다고 하지만, 官僚의 최고의 지위인 「蘇我馬子」에는、冠位에 대한 記述이 일절 없다. 冠位는 무엇이고, 冠의 色은 무엇이었을까? 혹은、冠位를 주는 측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皇極 2年冬 10月6日에는、
「蘇我大臣 蝦夷는 病때문에 登朝하지 않았다. 가만히 紫冠을 子인 入鹿에게 주어 大臣의 지위에 비교했다」
・・
紫冠는 문자대로 紫色의 冠이었다고 생각된다. 紫色은 古代에는 더욱더 고귀한 색이었다고 생각된다. 大臣이 紫冠이라면、天皇은 어떤 색의 冠이었을까? 紫 이상으로 고귀한 색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紫야말로 天皇에 상응하는 색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蘇我蝦夷」는 天皇에 상당하는 位였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앞의 『先代旧事本紀』의 系図를 보아주기 바란다.
『先代旧事本紀』에서는、「馬子」의 子를 「入鹿 (이루카)」으로하여、『日本書紀』에 기록되어있는 「蝦夷(에미시)」를 무시하고 있다.
대개 「蝦夷 (에미시)」라고 하는 멸시하는 이름 자체가 虚名이란 것 정도는 누구라도 알수 있는 것이다.
(※각주:「蝦夷 에조」 北海道의 옛이름, 「蝦夷 에미시」아이누족이다)
이 系図로부터 「蝦夷」・「馬子」 2世代는、「馬子」1世代로 하게 된다.
물론 『日本書紀』의 事績은 진실이 아니라고 推察하고 있다.
関祐二氏는、『元興寺縁起帳』・『日本書紀』・『先代旧事本紀』로부터 각각의 系譜를 도출하고 있지만, 왠지、聖徳太子는 用明의 皇子라고 하는 『日本書紀』의 系譜를 무시하고 있다.
『日本書紀』
用明天皇──────穴穂部間人皇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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厩戸皇子
이것에다 앞의 3개의 系譜를 합치면,
「穴穂部間人皇女」=「物部鎌姫
大刀自連公」=「物部守屋」의 妹이며、
用明=「蘇我馬子」에도 比定할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系譜上으로는、「入鹿」의 父「蝦夷」는、用明=「蘇我馬子」와 동일인물이 된다.
関祐二氏는、이 系譜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하여 무시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日本書紀』의 術中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10巻本』은 『用明紀』・『崇峻紀』를 제외하여、 각각 독립한 天皇紀로 되어있다.
어디까지나 상상뿐이지만, 각각의 편집자세는 天皇 1인에 대하여, 천황기 1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用明紀』・『崇峻紀』는 合編일까?
본래 이 両 天皇紀에 상당하는 부분은、『蘇我馬子天皇紀』1巻이었음에 틀림없다.
대담한 추리를 해보면, (全編에 걸쳐서 대담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와서 말할것도 없지만)、실제로 天皇이었던「蘇我馬子」를 、用明으로서 天皇家의 系譜에 집어넣어、崇峻으로서 죽인 것이다. 그것도、「馬子」本人에게 誅殺되었다고 하는 捏造를 했던 것이다.
그때문에『推古紀』의 冒頭에서、用明의 治世를 무시하고 마는 크나큰 실수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蘇我馬子」라고 하는 이름도 또한 멸시하는 이름인 것이다. 본명은 「厩戸宗我嶋」라고도 했을 것이다. 「太子」가 「厩戸宗我嶋」大王의 아들이기때문에야말로、「厩戸皇子」라고 생각한다. 「馬子」도 「厩戸」도 「우마코」라고 읽을수 있는 것이 아닌가? ( 혹시 이 2인이 친자관계가 아니고, 「馬子(우마코)」는 「入鹿」의 養父일런지도 모른다)
또 『日本書紀』에는 은밀히 「蘇我馬子」를 찬양하고 있는 記述도 있다.
「夏5月25日、馬子大臣이 죽었다. 桃原墓에 묻혔다. 大臣은 蘇我稲目(이나메)의 子로서、성격은 武略을 갗추고있고、政務에도 뛰어나고、 仏法을 공경하여、飛鳥川의 근처에 家居했다. 그 정원 가운데에 작은 못을 파서, 못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嶋大臣이라고 했다.」
이것은 推古天皇 34년에 있는 記事이지만, 이 칭찬은 바로 천황에 필적할 만한 것이다.
「蘇我」의 字를 맞힌 것은 執筆者 왈도라C이다. 「蘇我」는「我蘇리」라고 읽히지 않는가?
聖徳太子는 大王이며、「蘇我入鹿」=「蘇我善徳」과 동일 인물이었다.
『先代旧事本紀』는 「入鹿」을 豊浦大臣(『日本書紀』에서는 그 弟)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豊浦宗我善徳」大臣이며、「豊浦太子」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豊浦宮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馬子 (우마코)」・「蝦夷 (에미시)」・「入鹿 (이루카)」의 蘇我氏 3代의 이름은 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은『日本書紀』에 기록된 인물상과는 전연 달랐을 것이다.
최후가 推古天皇에 대해서이다.
4.환상의 推古天皇
推古는 用明의 同母妹였다고 하지만, 用命이 非実在라면 推古도 또한 非実在로 되어버리고 말지 않을까?
推古의 和風名은「豊御炊食屋姫尊」(토요미케카시키야 히메노미코도)이지만, 과연 즉위했을까?
「豊御炊食屋姫尊」은 어릴때 이름을「額田部皇女」라고 했지만, 「豊御炊食屋姫尊」와「額田部皇女」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推古紀』이외에서는、「額田部皇女」라고 기록된 것은 한번도 없을뿐만 아니라、『聖徳太子伝古今目録抄』에는,
「田村皇子、舒明天皇之太子御名也。推古天皇之御子也」
라고 하기때문이다. 『日本書紀』는 舒明의 母를 推古로 하지 않는다.
舒明의 母는、敏達의 女「糠手姫皇女」(누카데노 히메미코)이다.
이런것들로부터、「額田部皇女」는 舒明의 母「糠手姫皇女」와 동일인물로 생각되어져, 「豊御炊食屋姫尊」은 다른 사람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豊御炊食屋姫尊」는 대체 누구인가?
유감스럽지만 그녀도 또한 창조된 인물이며,『日本書紀』에 의하여 天皇의 지위를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뿐만이 아니고、『推古紀』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의외의 인물이 모델로 되어있다.
실은 「豊御炊食屋姫」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있다. 『日本書紀』神代에 등장하는 나카스네히코의 妹로서 니기하야히의 妃였던 「三炊食媛」이다.
・・・・・
「蘇我馬子」는、우마시마지(都市牛利)로부터 만들어진 이름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崇峻은 「馬子」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先代旧事本紀』에 의하면, 나카스네히코(難升米)는 우마시마지(都市牛利)에게 목이 베인 것이다.
또한 用命의 和名은「橘豊日」이지만、이것도 역시「饒速日」로부터의 造名이 아닐까라고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를 물어도 대답에 궁해지고 말지만, 대략 우마시마지(都市牛利)의 나가스네히코(難升米) 살해는 家臣에 의한 大王살인이라고 하여 항간에서도 유명한 悪業伝説이 있다.
『日本書紀』의 편찬자에 의한、「馬子」라고 들리면, 大王살해를 연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작한 것이 아닌가?
『日本書紀』의 나가스네히코는 니기하야히에게 살해되고 있지만,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는 곤란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 아닐까?
내친김에「蘇我入鹿」의 이름의 모델로는、『三国史記』의 『高句麗本紀』에 등장하는 「泉蓋蘇文」이다. 그에 관해서는 『日本書紀』에도 大臣「伊梨柯須弥」(이리카수미)라고 확실히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皇極紀』元年2月6日의 다음의 記述이다.
「高麗의 使人이 難波津에 머물렀다. 21日、諸大夫등을 難波郡에 보내어, 高麗国이 바쳤던 金銀등과、다른 献上物을 점검시켰다. 使者는 貢献의 일을 마치고나서, 『작년 6月、弟王子가 죽어서、秋9月、大臣 伊梨柯須弥가 、大王을 죽이고、아울러 伊梨渠世斯(이리고세시)등 180여명을 죽여습니다. 弟王子의 子을 王으로 세우고、자신의 동족인 都須流金流(츠수루곤루)를 大臣으로 했습니다』라고 했다」
「泉蓋蘇文」의 이름은「蘇我入鹿」에、그리고 그 事績은「蘇我氏」3代의 事績에 꼭 그대로이다. 라고 하기보다 같다고 해도 지장이 없다. 이것은 이제는 의심할 것도 없고,「馬子」・「蝦夷」・「入鹿」3代의 인물상은「泉蓋蘇文」으로부터 창조된 인물상임에 틀림없다.
「蘇我蝦夷」는 주로『舒明紀』에 등장하지만, 『舒明紀』에는 말하자면, 東国의 蝦夷가 등지고 있고, 「蘇我蝦夷」와 東国의 蝦夷를 、일부러 혼동시키려는 記述로 되어 있다.
예를들면、蝦夷에게 토벌당했던 「大仁上毛野君形名」의 妻의 말을、
「분하다. 蝦夷때문에 살해당하고 말았다는 것은」
라고 기록하고 있다.
『日本書紀』가 노렸던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蝦夷」를 混同시킴으로서、기록할수 없었던 舒明朝와 「蘇我氏」의 대립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기록할수 없었던가? 그것은 이때의 戦争에서、舒明朝는 본거지인 岡本宮을 잃어버릴 정도의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推古天皇」이 非実在임에도 、이 시대는 확실히 女帝의 시대였다.
앞에서 掲載했던、『元興寺縁起帳』에 있는 系譜를 보면,
「大大王」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大大王」이라는 것은,「物部守屋」의 妹、「物部鎌姫大刀自連公」에 比定할수 있다.
그녀야말로 이 시대의 女帝였으며、大王보다 위의 「大大王」즉, 天皇이었던 것이다.
「聖徳太子」는 皇太子이면서 大王이었다고 하는 모순도、이때 존재했던 「大大王」의 존재에 의하여 무리없이 설명할수 있다.
『隋書倭国伝』에 記述되어 있는、倭王「阿海多利思比弧」는 역시 聖徳太子였을 것이다.
『日本書紀』가 推古天皇을 창조했던 이유는、「物部鎌姫大刀自連公」天皇하의 蘇我王朝를 말살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생각할수 없다.
그리고 聖徳太子=「蘇我入鹿」이라면、推古=皇極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결국 推古는、実在했었을「額田部皇女」에 중첩하여 들어가 있는 皇極이나「物部鎌姫大刀自連公」을 모티브로하여 만들어졌던 実体가 없는 女帝였던 것이다.
推古一代의 추가에 의하여、「馬子」・「入鹿」의 親子関係에도 世代間의 갭이 생기고 말았다.그 결과、「馬子」의 子「蝦夷」를 창조하여, 세대의 틈을 메울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入鹿」은 3세대후의 「乙巳의 変」으로 살해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舒明紀』의 9年에
「이해、蝦夷가 반역하여 入朝하지 않았다. 大仁上毛野君形名을 불러서, 将軍으로서 토벌시켰다. 그러나、오히려 蝦夷에게 타격을 받아、도망가 성채로 들어가고 말았다. 드디어 적에게 포위당했다」
라고하여, 여기서도「蘇我蝦夷」에 대해서도、蝦夷에 대해서도 연결되지 않는 애매한 記述을 하여, 実像을 감추면서도 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蘇我氏」는 実像이 말살당했을뿐만 아니라、天皇家에 있어서 史上 드물게 보이는 대악인으로 되고 말았다.
그 배경에는、당시의 朝鮮半島 문제가 복잡하게 뒤얽혀져 있었을 것으로 용이하게 추측할수 있다.
흔히「百済」・「新羅」와의 2国간의 문제가、발단이 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한층더 복잡한 사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5.親「百済」인가 親「新羅」인가?
야마토정권은 、어느쪽이냐하면, 「百済」로부터의 朝鮮外交였다고라고는 인정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継体朝는、「百済」의 斯麻王(25代王、武寧王)으로부터 보내졌던 人物画像鏡(「隅田八幡宮」和歌山県橋本市隅田町)의 銘文으로부터도 알수 있듯이, 상당한 親「百済」派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그 대항세력이 되었던 「磐井」가 「新羅」와 손잡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継体朝의 외교는「百済」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任那」四県의 무조건 割譲등으로부터도 추찰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継体의 皇子인 欽明의 崩御時에는、「新羅」가 弔使로서 「未叱子失消」(미시시시시요우)등을 보내어、殯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이「新羅」의 태도는 예삿일이 아니다. 欽明이 親「新羅」派였다고밖에는 말할수 없다.
継体朝와 欽明朝와의 사이에、조선외교 방침을 一転시킨듯한 무언가가 일어났다고 생각되어질수 있다.
당연, 「任那」가 문제의 중심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사실은「任那」문제만이 아니고,
「百済」자체의 국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私見에 의하면、「百済」는「任那」四県을 점령하여、継体朝에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大伴氏」 주도로 행해졌던 것 같고、後에「大伴氏」는 정치책임을 지고 실추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大伴氏」는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듯、「任那」부흥의 군을 朝鮮半島에 보내고 있다.
『宣化紀』2年의 条에는、
「新羅가 任那를 침입해왔기때문에 大伴金村에게 기록하여、그 아들인 磐과 狭手彦을 보내어,任那를 도왔다. 이때 磐은 筑紫에 머물러、 그 나라의 정치를 쥐고, 三韓에 대비했다.
狭手彦은 그 땅에 가서 任那를 점령했던 百済를 구했다」
라고 되어 있어、宣化의 명이기는 했지만 渡航했던 将軍은、모두 大伴 일족으로、「大伴氏」의私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은、더욱더「任那」를 침공했던 것은、「新羅」가 아니고「百済」였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推古紀』31年에、「田中臣」의 흥미깊은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百済는 자주 豹変하는 나라이다. 도로의 구획조차도 거짓이 있다. 대략 흔히 말하는바 아무것도 믿을수가 없다. 百済에게 任那를 붙혀서는 안된다」
이렇게,「百済」는 자주 배신하는 나라인 것 같다. 가령 조약이 체결되어 있다고 해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継体朝로부터 欽明朝에 걸쳤던 시기도, 「百済」의 배신이 있어「任那」四県이상으로 침공했을런지도 모른다.
「25年3月、진군하여 安羅에 도착하여、乞屯城을 만들었다. 이달 高麗는 그王、安을 弑害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 皇子가 모두 죽고 말았다」
몇번이고 掲載하고 있지만, 『継体紀』25年에 있는『百済本紀』로부터의 引用이다.
진군하여 「安羅」에 도착한 것은 과연 倭軍이었을까? 반복하지만, 이것은『百済本紀』로부터의 引用인 것이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은, 自国의 일이기 때문이다. 日本의 国名이 記載되어 있는 이상、주어는 「百済」이다.
모두 죽은 것은、宣化天皇과 그의 皇子였다는 것은 前述하고 있지만, 한꺼번에 전원이 죽어버리는 것은、暗殺인지 自殺인지를 想定시킨다. 또 자살하는 이유도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것이건 자연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推古天皇 9年秋9月8日의 条에、
「新羅의 間諜인 迦摩多가 対馬에 왔다. 그것을 체포하여 조정에 보냈다」
라고 되어있고, 「新羅」의 간첩이 倭地에 왔던 것은 충분히 생각할수 있는 것이다.
「新羅」만이 아니고「百済」・「高句麗」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宣化 일족이 모두 죽은 이면에는, 간첩의 암약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新羅」일런지도 모르는 것은『日本書紀』의 記述의 방향성으로부터 상상할수 있지만, 『百済本紀』를 인용하는 것으로、암암리에「百済」의 관련을 피하고 있는듯이 생각된다.
거꾸로 말하면、「百済」야말로 真犯人이 아니었을까?
『欽明紀』7年秋7月、百済王이 任那王에 대하여 말했다는 記述이 있다.
「옛날、우리 祖先 速古王・貴首王과、당시의 任那諸国의 国王등이 、처음으로 和親을 맺어서兄弟의 관계로 되었다. 그런까닭에 나는 너를 자식과도 동생으로도 생각하고, 너도 나를 父로도 兄으로도 생각하여, 함께 天皇을 섬겨서 強敵을 막고、국가를 지키어 오늘에 이르렀다.・・以下略・・・」
국가간의 우열은 놔두고 이와같이,「百済」・「任那」・「倭国」은 각국이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連邦国家의 양상이었다. 대략「新羅」와의 관계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百済」와「新羅」가 対「高句麗」와 싸울때 이외는、서로 원수지간인데 대하여, 「倭国」과「任那」는「百済」와「新羅」 양쪽에 국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百済」는「高句麗」에게 旧地를 빼앗긴 이래, 부흥의 길을 모색해왔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가 「任那」四県에로의 침공이었을 것이다.
단지「百済」기세는、「任那」四県에 머물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宣化天皇의 夏 5月1日의 条에、「筑紫」의 官家를 정비했다는 記述이 있다.
「食은 천하의 근본이다. 黄金이 万貫 있어도、굶주림을 해소할수는 없다.
真珠가 千상자가 있어도、어떻게 얼은 것을 구할수 있겠는가?
筑紫国은, 원근의 나라들이 조공해오는 곳이며, 왕래의 관문으로 하는 곳이다.
이때문에 해외의 나라는 조류의 흐름이나 기후를 관측하여 조공을 바쳐온다.
応神天皇의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볍씨를 거두어 비축해왔다.
흉년에 대비해 賓客을 접대하고, 国를 위로하는데、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거기서 자신도 阿蘇君을 보내어, 河内国 茨田郡의 屯倉의 벼를 운반시키라
蘇我大臣 稲目宿根은 尾張連을 보내어、尾張国의 屯倉의 벼를 운반하라.
物部大連 麁鹿火는 新家連을 보내어、新家屯倉의 벼를 운반하라.
阿部臣은 伊吹臣을 보내어、伊賀国의 屯倉의 벼를 운반하라.
屯倉을 那津의 口에 세우라.
또、저 筑紫・肥国・豊国의 3개의 屯倉은、각각 떨어져 있게하여, 혹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급하게 준비하는 것이 어렵다.
諸郡에게 명하여 나누어 옮겨서, 那津의 口에 모아 세워서, 非常시에 대비하여, 백성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빨리 郡県에 명령하여、
나의 마음을 알게하라」
「那津의 口」라는 것은 博多 大津이다. 아주 급하게、筑紫에 볍씨를 비축하라는 명령이지만, 내용은 비상사태 선언이며, 전쟁에 대한 대비로밖에 생각할수 없다.
欽明朝의 記述은、바로 朝鮮 3国과 倭国과의 『4国史』의 모습이다.
그 記述은 당연, 「倭国」우위로 기록되어 있지만、「任那」의 토지를 둘러싸고 이권을 꾀하는 「倭国」・「百済」・「新羅」의 三国과、그것에 굴하지 않는 「任那」、심지어는、国家의 틀을 짜는데 굴하지 않는 自治区와의、巴戦이라고도 할수 있는 공방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상상한다.
앞서「任那」를 점령한 「百済」였지만、宣化의 代에、기세를 틈타「筑紫」조차 침공 하지 않았다고 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継体朝에서 주고받은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국가정세가 있었던 것이다.
国王도「武寧王」으로부터 「聖明王」으로 바뀌었다. 실은「百済」자체가 분열해있었다고 생각된다(이것이 「倭国」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宣化는 「筑紫」를 정비하여 「百済」에 대비했지만、「百済」가 취한 수단은 密使・間諜에 의한 게릴라전으로서、이때
「日本의 天皇 및 皇太子・皇子가 모두 죽고 말았다」인 것이다.
요약하면, 살해당한 것이다.
젊은 欽明天皇을 세워서、「新羅」와 손잡아 政権 存亡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欽明崩御의 틈을타 「百済」는 정권을 빼앗는데 성공했다. 『日本書記』에는 記載되어있지 않지만(記述했을리도 없지만)、이때의 戦爭에서、「筑紫」는「百済」에게 눌려버렸다고 생각한다. 또한 추측하자면, 「筑紫」에 설립했던 「百済」의 거점이 「太宰府」였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거점은 現 太宰府 政庁 跡의 장소와는 달리、博多那의 津에 있었던 것 같지만, 「倭国」의 朝鮮半島 정책의 거점이, 「任那日本府」였다고 한다면, 「百済」의 倭地에 있었던 거점이 「百済太宰府」였다고 생각된다.
의외로、실제로는「筑紫」에 있었던「任那日本府」跡을 、몽땅 그대로 「百済太宰府」로 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 후방지원이 있었으므로해서, 敏達은「百済」의 大井에 宮을 마련할수 있었고, 舒明은「百済川」부근을 宮地로 한「百済宮」을 세우고, 「百済大寺」를 세울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舒明의 崩御에 있어서는、宮의 北쪽에 殯宮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것을「百済」의 大殯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百済」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혹은、도래한 백제인이 많이 살고, 현대에서 말하는「리틀 토쿄」같은 것이라고 반론하는 분도 계시지만, 야마토정권의 天皇이 무엇이 좋아서 그러한 가운데에 타국명의 궁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예를들면 현대의 明仁天皇이 아메리카市에 皇居를 정해、皇居를 아메리카宮이라고 이름 붙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大和의 天皇이 「百済」를 자기 이름으로 쓰는 것등은 도저히 생각할수 없다.
따라서、이때는 틀림없이「百済」정권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倭国」의 땅에 존재했던 「百済」政権(敏達・舒明朝)와、「倭国」의 在地勢力과 손잡았던 정권이、皇極(推古)朝이며 斉明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中大兄皇子」가 「百済」본국의 존망을 걸고、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白村江의 싸움」에 도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王朝의 적대세력이 「蘇我氏」이며、「蘇我氏」는 단순한 일개호족이 아니고 또하나의 大王家였다.
天皇이라고 하는 名詞가 정착한 것은、天武朝 이후부터라고 말한다. 그 이전은、大王이라고 불렸다. 天武朝 이후에 성립했던 『日本書紀』는 당연히 天皇이라고 하지만, 타문헌과를 비교해보면 大王이라고 칭해졌던 것이 판명된다.
검증할수는 없지만, 본래「大臣」(오오오미)・「大王」(오오키미)는、같은 발음이며、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들에 格의 차는 없고, 大王家가 천하를 취한 이래, 大臣家는 그 밑에 두게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蘇我稲目」의 정식 이름은、「蘇我大臣稲目宿禰」이라고 하지만, 대개、『日本書紀』는「大臣」도「宿禰」도 朝廷으로부터 임명된 姓이다. 따라서 이것이 중복될리는 없을 것이다.
「蘇我稲目」의「宿禰」姓은、「大臣」을「大王」보다도 밑에 둘려고 하는 속셈이 어른거린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大連도 일찌기는 大王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大臣보다도 이른 시기에 大王에게 굴복했을 것이다.
이章의 맨마지막에、「蘇我氏」가 한때는 최고권력자였다는 확고한 증거를 들어보겠다.
「乙巳의 変」의 後의『皇極紀』4年6月13日에、
「蘇我臣蝦夷등은 죽기전에、모든 天皇記・国記・珍宝를 소각했다」
라고 하지만, 왜 天皇記를 소각할 필요가 있었는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더구나 그것은 『推古紀』28年12月1日의 条에 의하면、聖徳太子와「蘇我馬子」가、기록했던 것이다.
天皇記라고 하는 것은 天皇家의 역사서이다. 그것을 소각하지 않으면 안될때는、나라가 망하여 天皇家와 天皇家의 역사가 더럽혀질때이며、天皇자신이 자신의 기록을 처리하는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