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原大和朝廷의 時代
原大和朝廷의 時代 http://www2.plala.or.jp/cygnus/k4.html
1.原大和 朝廷에서의 崇神天皇
崇神은 大和朝廷의 初代天皇이지만 후세에서 말하는 天皇이 아니고 이 시점에서는 族長 클래스정도에 불과했으며 나라라고 하는 것도 자치권을 행사하는 정도의 좁은 범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邪馬台国」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葛城王朝의 孝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畿内政権(以下、原大和朝廷)과 葛城王朝를 비교해보면 、大和朝廷은, 崇神에 의한 게릴라전으로 쇠퇴해진반면, 葛城王朝 쪽이 국력이 충실했을 것이다. 주변제국에의 威勢는、압도적으로 葛城王朝에 유리했다고 생각된다.
당시 葛城王朝나 原大和朝廷등이라고 말하고 있는 「王朝」라는 것은,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던 大王은、지방에 얼마던지 존재하고 있었다. 자치구는 좁더라도 대왕의 位가、대대로 계승되고 있는 나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王朝」이다.
「吉備国」에는 吉備王朝가、「出雲国」에는 出雲王朝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외에도 日本列島에 넓게 존재하고 있었다. 大和朝廷과는 협력관계나 주종관계도 있었다.
그런데 、崇神의 原大和朝廷에서、崇神은 토착세력을 굴복시켜 군림했던 천황이란 것을 엿보게 할수 있는 記述이 『記紀』에 있다.
「国内에 疫病이 많고, 백성의 반수가 사망하고, 백성이 유리하거나 반역하여 그 기세는 德으로서 다스리려고 해도 곤란했다」
이것이야말로 崇神이 다른 지방으로부터 進入해온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尾張氏」・「物部氏」・「天皇家」등으로 불리는 氏族이、자기들 마음대로 정한 소유지에 대하여 자치권을 행사한 것으로 지금식으로 말하면 정당집단 같은 것이었다.
이때의 大和朝廷등은 이름뿐이고 큰 힘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2.三輪山의 오오모노누시(大物主)는 가짜이다.
오오모노누시(大物主)는、수사노오의 존칭이다.
오오쿠니누시(大国主)가 오오모노누시(大物主)를 모신곳은「出雲」의 三室山이며, 磯城지방의 三輪山에 오오모노누시(大物主)를 모신 것은 崇神때가 처음이다.
崇神朝에서 宮中에 모셔진 神은 호아카리와 니기하야히이지만, 니기하야히는、야마토오오쿠니다마,즉 국가수호로 위치지어지고,
아마테라스=호아카리는、笠縫邑의 작은 祠에 모셔졌으므로 그 대우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物部氏」의 의견이 반영되어졌을 것이다.
崇神朝에서의 정치의 주권이 「物部氏에게로 옮겨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記述이 있다. 三輪山의 오오모노누시도「物部氏」의 神으로서、위치지어진 感이 있다. 오오모노는 大物, 大人物로 사용되어 수사노오에 상응하는 존칭으로 사용하여, 「物部氏」가「大物部의 主」로 바꿔치기한 뉘앙스가 있다. 그 神이 崇神朝이래 天皇家의 守護神으로 되어갔다.
『記紀』의 出雲神話를 읽으면 오오모노누시(大物主)는「物部氏」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수있다. 오오모노누시(大物主)는、수사노오의 존칭으로서, 고사기에서는 오오모노누시의 5세孫이「意富多多泥古」이고 그 父가 미케히코로서 수사노오의 系譜이다. 그런데 三輪山의 오오모노누시가 니기하야히라면 祭神이 바꿔치기 당한 것이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수사노오를 제사지내는 것처럼 하면서 실상은 「物部氏」의 神 니기하야히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현재, 三輪山의 大神神社에서 제사지내는 3神이 오오모노누시, 오오나무치 (大穴牟遅, 大己貴命). 스쿠나히코나인데 오오모노누시가 니기하야히라고 한다면 이 3神간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게 된다.
오오모노누시의 正式名이 「大物主櫛(甕)玉命」으로 神社伝承学에서는 「櫛(甕)玉」부분이 니기하야히의 풀네임의 일부이므로 오오모노누시=니기하야히라고 한다.
3.「櫛玉伊勢津彦命」의 謎
伊勢地方의 神에「櫛玉命」、別名、「伊勢津彦命」(이셋츠히코)가 있는데
오오나무치의 子로서、「出雲建子」의 別名을 가지고 있다.
「櫛玉」이란 칭호가 붙어있다고 해서 동일신으로 간주하면 안된다.
4.渡来해온 協力者・扶余族
「尾張氏」입장에서 보면、오오모노누시를 수사노오가 아닌 니기하야히로 한 「物部氏」에 대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崇神は、四道将軍을 東海・北陸・西海・丹波로 파견한다.
西海는 「吉備津彦」이 파견된 것으로보아、吉備国일 것인데 자기 출신지를 공격하는 것이 되어 신빙성이 낮다.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四道将軍은 지방으로부터 적을 평정한 모양을 보고했다. 이해에 異族의 사람들이 대거 와서 국내는 안정되었다」
畿内를 제압하는데 한계를 느낀 崇神이、海外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는데, 후일의 관계로 보아 「百済」로 보여진다.
이즈음의 中国은、「魏」・「呉」・「蜀」의 三国時代였으며 (220~280)、
南朝鮮半島는、「馬韓」・「弁韓」・「辰韓」의 3국이 국가로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崇神이、군사지원을 요청한 百済는 그 前身인「馬韓」이 아니다. 北方의 기마민족인 扶余의 망명귀족인 것이다.
중국과 고구려가 요동땅을 차지하기위해 늘 전쟁을 하였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망명한 백제와
「旧奴国」과「邪馬台国」간의 전쟁을 피해 탈출한 미마키=崇神이 닮은 점이 있다.
부여의 망명귀족들은 잘되면, 통채로 빼앗을수 있겠다싶은 의식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5.出雲王朝의 屈服
4세기가 되자,「馬韓」・「弁韓」・「辰韓」은 각각 「百済」「伽耶」・「新羅」로 발전하지만, 「馬韓」만은、「扶余」의 망명귀족들에게 그 땅이 점령되어 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百済인 것이다.
扶余의 망명귀족들에게 군사지원을 받아、畿内를 평정시킨 崇神은, 畿内의 국력을 키운 후에 드디어 、大国「出雲」에 침공을 시도하였다.
『日本書紀』에는、「出雲」의 神宝를 둘러싼「出雲振根」(이즈모후루네, 以下、후루네)와 동생「飯入根」(이이루네、以下、이이리네)의 싸움의 설화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에따르면, 「出雲」의 神宝가 보고싶다고 하는 조정에 대하여,「筑紫」에 가서 부재중이었던 후루네 대신에 이이리네가 神宝를 제출하였다.
「筑紫」로부터 돌아온 후루네는 이이리네를 꾸짖고, 서로 木刀와 真剣으로 싸워, 사기당한 이이리네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같은 내용의 설화가 『古事記』에서는、「日本武尊」과「出雲建」의 説話로 바뀌어져 있다.
水野 祐氏가 쓴、『伝説의 神国 出雲王朝의 謎』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出雲의 首長国은 처음에는 2개의 블록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意宇川을 중심으로 하는 東出雲과、斐伊川을 중심으로 하는 西出雲이다. 그것은 意宇과 杵築의 2개의 지역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집단중、西出雲의 杵築国은 鏡・剣文化圏이며、그 首長은 八千矛神을 主神으로 하는 집단으로서、出雲振根으로 代表된다
(※각주:八千矛神=수사노오)
한편 東出雲은、大穴持命을 祖神으로 모시는 玉文化圏이다 그 수장은 飯入根과 甘美韓日狭로 대표된다(※각주:大穴持命=오오나무치)
이 양자간의 항쟁은 4세기 중엽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그사이 原大和国家의 세력이 강대해지고, 서진운동으로 먼저 吉備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出雲의 争乱에 개입했다. 振根은 大和의 개입에 반항하고, 飯入根은 大和勢力과 타협했다. 드디어 振根은 飯入根을 무너뜨려、西出雲이 한번은 東出雲을 정복했다.
그러나、甘美韓日狭과 그의 아들 우카씨쿠누가 大和정권과 협력을 얻어 세력을 만회하여 振根을 무너뜨려 東出雲이 西出雲을 통합했다」
私見과 연대는 달라도 내용은 납득이 가는 점이 있다.
神社伝承学에 의하면 八千矛神은、수사노오이므로、대대로、意宇国王(오오나무치)를 모셔왔던 東出雲과、
그후에 온 수사노오를 모시는 西出雲과의 争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대략 수사노오의 死後의 倭国大乱과 시기를 같이 할것이다.「出雲」자체는、수사노오의 死後、「統一奴国」으로부터 이른 시기에 독립하고 있었지만, 新参者인 수사노오派와 토착의 오오나무치派에 의해、「出雲国」을 2분화시킨、争乱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수사노오派의 후루네가 原大和조정에 굴복할 리가 없고, 한번은 「出雲国」을 통일하였지만, 결국은 原大和조정에 협력한 東出雲가 승리한 것이다. 東出雲이 原大和조정에 협력하게 된데에는 무언가 교환조건이 있었을 것이다. 崇神의 畿内세력보다도、東出雲의 세력쪽이 어떻게 생각해봐도 강대하므로 교환조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이것이야말로 出雲大社의 창건이라고 생각한다. 후일에도 大和조정은 「出雲」에 대하여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고 미심쩍은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이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崇神은、東出雲을 장악함으로써、九州를 제외한 西日本은 原大和조정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중앙집권국가가 성립한 것은 아니고, 각 지방에서 맘대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던 호족들에게 명령할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 범위는、「東出雲・東吉備・播磨・大和」부근이며, 九州에 가까이 있던 지방은 아직 포함되지 않았고, 「吉備・播磨」는、「尾張氏」에 의한 공적이 컸다고 생각된다.
原大和 朝廷은 최대세력인 「物部氏」、쇠퇴해가는 古豪族인「尾張氏」、그리고「扶余=백제」의 망명귀족,등의 세력에 의하여 성립되었고,이 시점에 있어서는 「天皇家」자체의 힘은 그다지 없었다.
『崇神紀』 말기에、任那国이 「蘇那曷叱智」(소나카시치)를 보내 조공했다는 記述이 있지만, 「任那国」의 성립은 4세기 이후였으므로 이것이야말로, 「扶余」의 망명귀족의 냄새를 풍기는 記述이라고 생각한다.
6.放浪하는 尾張族
258年、崇神은 그 生涯를 마친다.「邪馬台国」으로부터 탈출한지 10년후였다.
다음으로 位에 오른 것이 「邪馬台国」의 官이었던「伊支馬」(이키마)였다.
이름은「活目入彦五十狭茅天皇」(이쿠메이리히코 이사치노 수메라미코도)이다.
이쿠메의 시대가 되자「蘇那曷叱智」는 자신이 희망하여 돌아가 버리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질대우의「蘇那曷叱智」가 돌아가버렸다는 것은, 朝貢해왔다는 그 자체가、거짓 記述이라는 것이다.
『垂仁紀』에는、아마테라스가「倭姫命」(야마토히메노 미코토、以下、야마토히메)에게 빙의되어 、「伊勢」에 遷座했다고 하는 記述이 있지만, 아마테라스라고 하는 것은「尾張氏」의 祖神・호아카리이다.
이 記述은、「尾張氏」가 大和朝廷으로부터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마토히메의 行幸의 모습은、「度会氏」의 神道五部書의 하나인 『倭姫命世記』가 보다 상세하지만, 「度会氏」라고 하는 것은、호아카리의 孫인 아메노무라쿠모를 祖로 하는 일족으로서「尾張氏」와 동족이며, 야마토히메의 이름으로부터 実在라고 생각할수 없다.
처음에는、伊勢内宮은『日本書紀』의 성립에 의하여、女神・아마테라스를 섬기게 되고 말았지만, 본래는 호아카리를 섬기고 있었다. 外宮의 祭神은「豊受大神」이다. 그리고 이 両宮이 일체로 되어, 神道最高神・쿠니코다치를 모시는 社로 되었던 것이다.
그 前身은 籠神社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度会神道(伊勢神道)는、몇번이고 이 説을 설명하고 있다.
「尾張氏」는「丹波」地方의 豪族과 결합하여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세력은 「丹波」로부터 新潟에 걸쳐 日本海沿岸 일대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
이렇게하여 「尾張氏」를 중심으로 하는 海人들의 일대세력이 출현했지만 어쩐지 이 세력은 별로 오래가지 못한것 같다. 아마테라스가 이 지방에 머문 기간은 겨우 4년이었다. 통일세력은 4년후에 분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7.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浦島子
『丹後国風土記逸文』에는、「浦島子」의 説話가 기록되어있다. 이 「浦島子」는、「彦坐王」일것이다.「浦島子」가「彦坐王」이라면、崇神으로부터 垂仁시대의 인물이다.
「彦坐王」은、海人들의 통일세력의 왕이었다.
「丹波」는 언제나 大和조정으로부터의 정벌대상의 땅이었는데 「彦坐王」이 原大和朝廷에로 돌아서는데는 、垂仁의 큰 양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垂仁은、일찌기、九州연합국의・「邪馬台国」의 官이었다(지금의 동경도지사급)
「旧奴国」과의 전투를 피해, 「邪馬台国」을 탈출한 것도, 崇神을 먼저 왕위에 올린 것도、垂仁의 생각일 것으로 생각된다.
건국초기에는 무력이 큰 역할을 하고, 「邪馬台国」의 군사고문으로 생각되는 미마키가 왕이 되어, 토착세력을 제압해 나갔다. 굴러온 돌이었던 崇神은 환영받지 못하였고 그 결과 民・百姓의 반란이 끊이지않았고 최종적으로는 타국의 힘을 빌려 무력제압하고 있다.
崇神은、무력에 의한 살륙을 반복했을 것이다. 崇神이란 漢風의 天皇名에는 신을 섬기는 천황이 아니라 신이 두려워했던 천황이란 뜻이 포함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반해 垂仁은、仁愛・ 寛仁을 垂範으로 했던 天皇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垂仁은、무력이 아닌 徳에 의해 平定하려고 했던 것 같다, 예를들면、皇后의 葬祭時에 殉死를 금지시키고, 武器를 神社에 奉納시키고 있다. 또 「任那」로부터 온 人質「蘇那曷叱智」의 희망을 받아들여 돌려보내주었다. 이것은 군사지원차 건너왔던、扶余의 망명귀족들의 일이고、武器의 奉納도、武力放棄라고 할수있는 행동이다.
垂仁의 시대에、「丹波」・「但馬」・「山城」이 大和朝廷과 동포로 되었다.
東西로 갈라져 싸움을 반복하고, 崇神이 부여의 무력지원에 의해 제압했던 「出雲国」에 대해서도 、出雲大神의 재앙을 두려워하여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垂仁의 干支崩御年은、『古事記』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日本書紀』에 따른 다음의 景行天皇의 干支即位年이、「辛羊」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311年이나 371年이 垂皇의 崩御年이 된다.
덧붙이자면,『古事記』에 崇神의 干支崩御年은、「戊寅」년이므로 258년으로 比定되지만、『日本書紀』의 垂仁의 干支即位年은「壬辰」년인 272年이 되어、14年의 차가 있다.
『日本書紀』의 垂仁의 崩御年은 、정확하다고는 하지 못해도 4세기 초엽이었음은 의심할 바가 없다
垂仁에 의한 선정에 의해、西日本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부터 각지역의 자치구가 통합되어, 「奈良」의 大和를 首都로 하는 국가를 형성해 갔던 것이다. 물론 또하나의 王朝、葛城王朝도、수중에 넣었던 것이다.
崇神・垂仁의 시대의 특징은、前方後円墳築造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前方後円墳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奈良県에 있는 箸墓古墳이지만, 이 축조시기가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엽으로 되어 바로 崇神・垂仁天皇시대이다.
왜、갑자기 前方後円墳이 축조되었는지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정해진 것은 없다.、箸墓古墳의 길이는 약 280m라는 규모로서、그것을 축조하는데 걸린 시간이나 인력을 생각하면,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 된다. 즉 前方後円墳의 출현은 국가가 통일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최종시간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사노오시대의 「統一奴国」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統一奴国」이 수사노오라고 하는 카리즈마 있는 대왕 아래 각자 문화가 다른 민족이 거의 반쯤 굴복하는 형태로 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垂皇의 시대는 중앙과 지방의 분권을 인정한 평등관계이며 「邪馬台国」보다、더욱더 일보 진보한 연합국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統一奴国」은 수사노오가 죽음으로써 붕괴되었지만,「大和」를 首都로 한 連合国家는、天皇의 죽음에 따른 영향이나 바란스가 허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天皇과 地方王과의 관계도、「나와 너하는」사이였던 것이다.
단, 문화적 수준은 扶余族의 유입문화도 있어서,「大和」가 지방을 리드했음에 틀림없다.
가령, 수사노오의 시대를 「織田信長」의 시대라고 한다면、垂仁의 시대를 「秀吉」시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한다.
거대한 前方後円墳은、近畿地方에서만이 아니고、지방에서도 흔히 보이지만、「大和」에서 발생했던 前方後円墳이、지방으로 유행했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일설에는 大和朝廷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豪族만이 축조할수 있었다고 하지만, 저런 독특한 형태가 지방호족의 흥미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前方後円墳의 축조에는 기술적으로도 노력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으므로 쉽게 만들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前方後円墳을 축조할수 있는 지방은 大和에 비견할만한 국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8. 葛城王朝의 終焉
그런데 여기서 欠史八代라고 불리는、綏靖・安寧・懿徳・孝昭・孝安・孝霊・孝元・開化의 8인의 天皇에 대해서 다시 다뤄보고자 한다.
이章의 초반에、이 王朝는、孝昭一代뿐인 것으로 기록했지만、綏靖・安寧・懿徳은 제켜놓더라도、孝昭・孝安・孝霊・孝元・開化는、崇神朝에 앞서 並立하여、葛城을 본거지로 한 세력을 가졌던 大王이었다고 생각된다.
孝昭는、葛城의「出雲国」에서「尾張氏」와 손을 잡고 大王이 되었던 인물이지만, 뒤의 4명은 어떤 사람들일까?
『日本書紀』에 따르면, 孝安의 后方는、尾張氏系의 색이 짙지만、孝霊・孝元・開化의 后方의 順으로、物部氏系로 전도되어 갔다.
이즈음에도 「尾張氏」가 「物部氏」와의 정권투쟁에서 패해 그 지위를 박탈당해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葛城에서 孝昭・孝安의 2대가 계속된、「尾張氏」중심의 정치도、「物部氏」가 개입한 呪術政治에 억눌려、孝霊에 이르러서는、그 정권이 서서히 「物部氏」로 옮겨 갔던 것이다.
그러나、孝昭・孝安・孝霊・孝元의 4명에게「孝」의 문자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孝元까지는、孝昭系의 政権、즉「尾張氏」도 정치의 중추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開化에서는、완전히「物部氏」일색으로 된것으로 읽힌다.
葛城王朝의 政治中枢가、「尾張氏」로부터「物部氏」로 옮겨 갔던 것은、統治権力도、葛城王朝로부터 原大和朝廷으로 이행되어 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開化까지의 葛城王朝가、崇神의 大和朝廷과 並立하고 있었고、그럼에도 어느쪽이냐하면, 아직까지는 葛城王朝쪽이、原大和朝廷을 일보 리드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吉備王朝・出雲王朝라고 하는 보다 큰 세력인 周辺諸国과 결탁해 있었기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빈번하게 있었던 게릴라전의 고통에 더해、扶余의 망명귀족의 군사지원에 의해、原大和朝廷이 타국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葛城王朝도, 우호관계에 있었던 周辺諸国도、原大和朝廷에 끌려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葛城王朝의 최대의 정책실패는, 垂仁 代에、本家인「出雲国」이、原大和朝廷에 굴복해 가는것을、저지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出雲国」자체는、東出雲과 西出雲으로 갈려져、내란상태로 있었지만, 東出雲이、原大和朝廷의 협력을 얻어、西出雲을 제압해버렸고,「出雲国」이 原大和朝廷에 참가하는 형태로 되고말아, 원래부터 「出雲国」을 모태로 했던 葛城王朝는、완전히 고립무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葛城王朝의 선택은、戦争에 져 항복하는 수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실권이 崇神朝에게로 옮겨가버린 상황에서는 전쟁에 이른다고 해도 그것은 이제는 謀反외에는、大義名分이 서지 않았다. 葛城王朝도 原大和朝廷에 참가하는 이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葛城王朝의 命運은、이렇게 되고 말았다. 葛城王朝 최후의 天皇은、開化이지만、大和朝廷에게 나라를 열고(開)、同化했으므로 開化天皇일 것이다.
『垂仁紀』에서、垂仁의 皇后의 兄・「狭穂彦王」(사호비고오우)가 謀反을 꾀하지만,「狭穂彦王」은、開化天皇의 자식이며、葛城王朝의 복권을、垂仁의 암살에 걸었다고 생각된다.
葛城王朝는 계승되지 않게되고, 「葛城国」은、「狭穂彦王」의 죽음에 따라 쇠퇴해 갔지만, 후일의 応神天皇의 시대에는、일대세력으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 까닭은、応神의 출생의 비밀에 큰 관계가 있었다.
(※각주: 出雲最後의 政庁이 있었던 곳이 葛城山麓이다. 葛城은 「가라키」 또는 「가츠라기」라 읽고 加羅城, 伽倻城을 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