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과 숙신(肅愼)
1.고조선
윤내현 <고조선, 우리 역사의 탄생>에서 발췌
고조선이란 명칭은 무엇을 뜻하나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맨먼저 사용-왕검조선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따로 독립된 항목을 설정하여 기록했다. 일연은 고려시대의 사람으로 이씨조선이 건국되기 전의 사람으로서 고조선을 이씨조선 이전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위만조선과 같이 후에 출현한 조선보다 오래된 조선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랜생활동안 사용되면서 단군조선의 국명으로 고유명사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단군조선의 국명이라는 생각이 우리민족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하거나 기자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의 명칭으로 사용해야 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나라를 열고 비로소 그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잇다. 그런데 BC 2300년 무렵에 우리민족이 한자를 사용하여 국명을 지었을까?
한자는 원래 우리민족의 문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초기의 한자인 갑골문을 보면 문장구성이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중국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다. 우리말의 기본어순은 주어-목적어-동사인데 중국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순서이다. 따라서 우리말과 중국어는 원래부터 다른 말임을 알 수 있다. 한문의 모체인 갑골문의 문장구성이 우리말과 다르고 중국어와 같은 것으로 보아 한자가 우리문자였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같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나라이름을 처음부터 중국문자인 한자를 사용해서 지었을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쪽의 끝에 해가 뜨는 땅에 위치했으므로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했다.(地在東表 朝日鮮明)
그러나 BC 2300년 무렵에 '아침은 빛난다'와 같은 표현을 한자로 옮겨 국명으로 삼았을까?
[동사강목] 고조선이 선비(鮮卑)의 동쪽에 있었으므로 조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선비(鮮卑)라는 명칭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기원후이며 그전에는 선비와 오환을 합하여 동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명칭은 서기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신채호--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은 숙신(肅愼)에서 기원했으며 만주어의 주신(珠申)과 동의어일것으로 보았다. 만주원류고에는 옛날에
만주어로 소속을 주신이라고 했는데 주신이라는 음은 숙신에서 온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신채호는 소속을 의미하는 주신을 국명으로
받아들여 주신과 숙신, 조선은 동일한 음으로서 조선이라는 국명은 숙신에서 왔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인보도 이와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런데 만주원류고에서 주신을 숙신과 연결한 것은 만주족의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대만족주의(大滿族主義)의 산물이므로 믿을수
없을뿐만 아니라 만일 조선이라는 국명이 숙신에서 기원하였다면 조선이라는 국명이 출현한 이후에는 숙신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존재했던 전기간은 물론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에도 숙신이라는 명칭은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견해도 성립될 수 없다.
이병도 선생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아사달(아사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았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첫 도읍이 아사달로 기록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조선이란 고대 조선의 아사달이 한자화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일본어에 아사는 아침을 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사달에서 아사는 우리의 옛말로 아침을 의미하며 달은 양달이나 음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땅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사달은 아침땅을 의미하는 우리의 옛 말이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을 한자화하여 조선이라는 국명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이병도 선생의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대의 초기사회에서는 대체로 씨족이나 종족의 명칭은 그들이 거주한 지명과 일치하고 그들이 나라를 세우면 그것은 국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도 상(商)나라를 세운 상족은 초기에 상읍(商邑)에서 거주했었고 주족(周族)은 주원(周原)에서 거주했었다.
고조선의 도읍명이었던 아사달은 원래 조선이라는 뜻을 지닌 우리 말이었을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한 씨족의 원래 명칭은 아사달족이었으며 그들이 거주한 곳의 명칭도 아사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에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 교류를 갖게 됨에 따라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조선이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인들은 조선의유래를 어떻게 보았는가?
중국인들은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군조선현등을 그냥 조선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동일하게 붙혀진 조선이라는 명칭은 동일한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 -- 이에 대한 주석서 당시대에 편찬된 사기집해(史記集解) 와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두책은 魏나라의 張晏이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조선이라는 명칭이 생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수+列水), 산수(汕水)라는 3개의 지류가 합해져 열수라는 강이 있는데 낙랑군 조선현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鮮)의 음은 선(仙)인데 그것은 산수(汕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한 장안(張晏)의 견해는 사기 조선열전의 조선이라는 명칭에 대한 주석으로 실려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장안은 고조선이 아닌 낙랑군 조선현 명칭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고조선이 아니라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사기집해와 사기색은 저자들은 위만조선과 낙랑군 조선현을 동일한 조선으로 인식하고 장안이 말한 낙랑군 조선현의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주석으로 싣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군 조선현은 그 명칭이 모두 조선이었으므로 이들은 동일한 지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낙랑군 조선현의 명칭에 대한 유래가 고조선 국명의 유래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군 조선현은 북경 근처 오늘날 난하 유역에 위치해 있었으나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차지했던 나라로서 그 위치와 영역이 전혀 달랐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군 조선현이 위치해 있었던 곳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다. 이들은 같은 지역이었지만 그 성격은 달랐다. 기자조선은 기자가 중국에서 망명한 후 고조선의 거수국(渠水國)이 되었지만 위만조선은 중국 서한의 外臣으로서 고조선과는 적대관계에 있었고 낙랑군 조선현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다.
고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낙랑군 조선현등이 위치해 있었던 곳은 고조선의 출발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국명이었던 조선이 고조선의 서부변경지역이었으며 고조선의 출발지도 아니었던 낙랑군 조선현에 있었던 강명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은 성립될수 없는 것이다. 장안은 낙랑군 조선현에 습수, 열수, 산수라는 지류를 가진 열수라는 강이 흐르는 것을 보고 조선현의 명칭이 산수라는 강명에서 왔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장안이 살았던 시대는 고조선이 이미 붕괴된 후였다. 그러나 낙랑군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아니 그러한 말을 한 것은 고조선의 명칭까지를 의식했다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낙랑군 조선현이 설치된 것은 고조선 건국후 2,200 여년이 지난후였데 고조선의 국명인 조선이 낙랑군 조선현의 강명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성립될수 없다.
단군은 신이나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고조선을 통치했던 통치자에 대한 칭호였다.
중국 칭호인 왕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통치자를 단군 또는 한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최고 통치자를 천자(天子)나 왕 또는 황제라고 불렀다. 단군은 천자에 해당하는 말이었고 한은 왕이나 황제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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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수 논문 <요하문명과 고조선의 실체>에서 발췌 chaesu@korea.ac.kr
적잖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 민족의 기원을 논할 때 ‘예맥’(穢貊 : 濊 貉), ‘맥족’(貊族), 예족(穢族) 등과 연결시킨다. 서주시대(1122∼770, BC)의 사서로 알려져 있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 403∼221)에 편찬된 것으로도 이야기 되는 「일주서」(逸周書)의 「왕회편」(王會篇)에 ‘예인‘ (穢人)이란 말이 출현한다. 또 예맥(穢貊)과 관련해서는 「관자」의 소광편(小匡篇)이 보여주고 있듯이 예맥이란 말은 춘추시대(770~481, BC)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예(濊) 와 ‘맥’(貊)은 이미 서주시대의 사서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일주서」(逸周書)의 「王會篇」에 “穢人, 前兒”란 표현이 나오고, 「후한서」에는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 속에 기자가 예(穢)인을 상대로 예의와 누에고치를 가르쳤다는 말이 있다. 「시경」의 「한혁」(韓奕)에는 周의 여왕(厲王, 878∼828, BC)시대의 일을 읊은 가사 속에 ‘맥’(貊)족이 나온다. 「한서」(漢書)의 「왕망」(王莽傳)에서는 고구려인을 ‘맥인’(貉人)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한자 사용은 기원 14∼11세기 갑골문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요하지역에 최초로 청동기가 사용된 기원 2500∼2400년경에 맥족이 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은 기록될 수 없었다. 또 주 초기에 요하 서쪽의 맥족과 그 동쪽의 예족이 융합되어 예맥족이라고 하는 하나의 새로운 민족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원지역의 식자들에게 알려져 갑골문이나 금문(金文)등으로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서주 이전의 일은 춘추시대 이후의 기록을 가지고 추정해본다든가 혹은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 지식을 가지고 접근해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취해진다.
‘’(穢 : 濊)는 요하의 북쪽에서 주로 농업으로 생존하였던 민족이다. ‘맥’(貊 : 貉)은 요하지역에서 목축업에 종사했던 민족으로 파악되고 있다. ‘예’가 알타이산맥지역 출신이라면, 맥은 알타이산맥 이남 몽골고원 출신으로 고찰된다.
요서의 전기 청동기문화로 알려진 하가점하층문화(2400∼1300, BC)는 산융 (山戎)이 일으켰고, 그것을 배경으로 출현한 하가점상층 청동기문화는 동호(東胡)가 일으킨 문화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다. 일부의 중국 고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고고학자들이 한국 고유의 대표적 청동 유물로 파악하고 있는 비파형청동검을 하가점상층문화의 대표적 유물로 파악하면서 그 바파형청동검이 요서에서 출현해 요동으로 전파되어 나갔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또 부여의 기원지로 밝혀진 탁리(槖離)지역의 선인들이 하가점상층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백금보문화’(白金寶文化)를 일으켰다는 고고학 연구결과가 있다.
이 문화는 서주시대(1122∼770, BC)에는 이미 현재의 하르빈지역 근방의 눈강(嫩江)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한국민족의 원류로 받아들여지고 예맥조선의 선조로 고찰되는 맥족이 전기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하가점하층문화와 그것을 기초로 형성되어 나온 하가점상층문화의 주역이었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러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논거에 의거한 것이다.
동호는 춘추시대에는 산융이었는데, 전국시대(403∼221, BC)에 이르러 그것이 동호로 불리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근거는 ‘동호’라는 명칭이 전국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동호’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오는 「일주서」의 편집연대를 전국시대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일주서」의 편집연대를 서주시대(1122∼770, BC)로 파악하는 학자들의 경우는 「일주서」「사기. 흉노열전」등에 산융과 동호가 병칭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서로 다른 민족들로 보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산융은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의 상․중류지역, 즉 우하량(牛河梁), 동산취(東山嘴), 조양(朝陽) 등의 지역에서 터를 잡고 있던 민족이고, 동호는 지금의 시라므렌강 (西拉木倫河)유역에 있던 민족이다.
손진기는 산융이 동호의 선조일 수 없지만 , 예맥과 산융은 같은 민족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여러 자료들에 근거해, 예 혹은 예맥의 후예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하고 있고, 동호․ 산융․ 예맥을 같은 민족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어떤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계열의 민족들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며, 예맥중의 맥은 동호와 동원(同源)이라는 입장도 취하고 있 다. 중국인들은 춘추시대(722∼481, BC)에서 전국시대(403∼221, BC)에 걸쳐 이루어진 중국의 고문헌에 나타나 있는 명칭들을 근거로 해서 요하지역에 산융, 동호, 예맥(예족, 맥족) 등이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어느 민족이 제일 먼저 이 지역에 거주했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볼 때, 서주 이전까지만 해도 예족과 맥족은 요서지역의 홍산문화권의 동과 서에서 별도로 생활하였다고 추정된다. 중원지역에서 기원전 1766년경 상(은)이 건립되기 이전까지 대릉하 유역에서 살았던 맥족(손진기는 이 민족을 산융족이라 말하고 있음)의 경우 상(은)의 건립시점에서 요서의 남부 지역으로 남하해 난하의 하류 지역에서 터를 잡고 그곳에서 고죽국을 세웠다.
그러자 요하의 동북쪽에 있던 예족이 요서지역으로 남하해 맥족이 살던 대릉하 중․상류지역을 점령해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중원의 철기문화가 북상해 옴에 따라, 맥족은 다시 예족이 차지해 살고 있던 요하의 중부지역으로 이동 해 올라갔고, 또 그의 일부는 재차 요하지역의 동북쪽으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그 일부가 맥족과 결합해 김정배가 말하는 예맥조선을 대릉하와 요하 사이의 부신(阜新)지역에서 설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맥조선이 부신지역에서 설립되었다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삼국유사」의 「고조선 단군왕검」편에 「 주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기자가 단군족의 정치적 무대였던 요하의 남부로 망명해 들어와 중국의 중원정부의 국력을 배경으로 해서 그 지역의 주도권을 행사해 가려하자 단군족은 그 지역을 떠나 요하지역의 중부에 위치한 그들의 원향인 조양지역 쪽의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해 올라갔다고 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필자가 부신지역을 장당경으로 파악한 것은 한무제가 요하지역의 남부에 위치해 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삼군을 설치한 다음 그 이듬해 요하지역의 또 다른 세력을 쳐부수고 그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했는데 바로 그 지역에 부신지역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앞의 인용문에 이어「단군은 후에 아사달로 돌아가 은거하다 산신이 되었다」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예맥조선’이 장당경에서 한무제에게 멸망당하자 나라를 빼앗긴 후, 단군조선이 최초로 건립되었던 조양지역으로 피신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사실에 대한 논거는 1973년 중국학자들에 의해 대릉하 일대에서 기후명 방정(箕侯銘 方鼎)을 비롯한 상말 주초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그것들을 기자조선이 실제 존재했었다는 고고학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필자는 그것과 더불어 그것들이 난하 하류에 정치적 무대를 지니고 있던 ‘단군조선’이 대릉하의 중류로 천도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국 측의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객좌(喀左) 일대 청동기 매장지에서는 계통이 다른 여러 개의 족씨 (族氏)집단 명문이 섞여서 함께 출토되는 특징이 보인다. 이것은 특정 족씨 집단의 존재나 활동과 관련되기 보다는 이들 여러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상위 세력에 의해 이 지역 청동기 매장지가 조성되었음을 말해준다.”그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필자는 그 ‘상위세력’이 바로 그 지역으로 정치적 무대를 옮긴 ‘단군 조선’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군조선’이 난하 하류에서 대릉하 중류로 북상해 그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에서도 그랬고 또 부여의 성립시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해볼 수 있다. 맥족은 지배층을 차지했었고, 예족은 피지배층을 차지했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런데 제환공(齊桓公)이 기원전 664년에 산융을 쳐부수었는데, 이때 제환공에 의해 멸망된 나라는 고죽국이었다. 고죽국이 멸망하자 그 유민들 일부는 요하의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송화강 유역에서 부여를 건설한다. 이 때 서남으로 부터 올라온 맥족은 지배층이 되고 그 지역의 예족은 피지배층이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고죽국이 멸망한 자리에는 동호가 남하하여 산융의 고지를 점령해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연의 진개(秦開)가 284년에 그들을 1천리 밖으로 퇴각시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다음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와서 부여인 주몽이 요하지역으로 남하해 고구려를 세웠다.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와 그 변천 과정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아사달이라 불리던 지역에서 ‘조선’이란 국가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면 그 아사달이란 지역은 어디 인가?
당시 홍산문화권 내에서 문물이 가장 번성 했던 곳은 우하량 지역으로 추정된다.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의 유적....
‘아사달’이란 말은 한자로 표현하면 ‘朝陽’(아침 해 : 아침 해가 뜨는 작은 산)이란 뜻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어로 ‘朝陽’이라 불리는 지 역이 우하량으로부터 100km 이내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라의 동쪽지역에서 상왕조(商王朝, 1766∼1122 경, BC)가 건국되었다. 또 그 시점에서 조양일대에서 거주하고 있던 ‘단군조선’의 후예들은 난하 하류지역 근처의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이란 지역으로 천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하 하류지역의 주변이 중국어명 ‘朝鮮’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무렵부터로 고찰된다.
그러나 상주(商周)의 교체기에 와서 중원지역으로부터 기자와 같은 구상(舊 商)의 유민들이 그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오자, 다시 ‘단군조선’은 그들의 정치적 무대를 요서의 옛 수도 조양(朝陽)지역,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양의 동북쪽에 위치한 장당경(藏唐京), 즉 지금의 부신(阜新)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군조선’의 정치적 세력들이 전부 난하 하류지역을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일파는 난하 하류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지역에 도착한 중국의 주나라 세력들은 난하 하류 지역에 잔류해 있던 ‘단군조선’의 일파를 일명 ‘고죽국’이라 불렀고, 또 기자가 난하 하류의 ‘단군조선’지역에 세웠다고 하는 나라를 ‘기자조선’이라 불렀다. ‘단군조선’은 대릉하와 요하 사이의 장당경으로 천도하고 북상한 맥족과 남하한 예족이 다시 한번 더 결합해 그곳을 중심으로 예맥조선을 건국하였다. 우리가 ‘단군조선’의 건립 시점에서 행해졌던 서의 맥족과 동의 예족 사이의 결합이 제일차적 결합이었다고 한다면, 예맥조선의 성립 시의 그들 사이의 결합을 제이차적 결합이라 말해볼 수 있다.
「관자」의 「소광편」(小匡篇)에는 기원전 664년 “제 환공이 진공을 구하면서 적군의 왕을 사로잡고 호맥(胡貊)을 패퇴시켰으며 도하를 깨트려 기마오랑캐를 비로소 복종시켰다”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에서의 ‘호맥’은 고죽국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에서 손진기는 ‘호맥’을 동호(東胡)로 보고 있으나, ‘호맥’을 고구려로 보는 자도 있다. 「사기」의 「흉노열전」에는 「연나라의 현장 진개는 흉노 (胡)에 인질로 잡혀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 후 연나라로 돌아온 후 그는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000여 리나 후퇴하였다. ---연나라는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여러 군들을 두어 호(胡) 를 방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나라의 진개는 연소왕대(311〜279, BC)의 장군이었다. 이렇게 볼 때 주 초부터 지금의 부신(阜新)지역 근방에 위치해 있던 예맥조선은 진개의 동방 공격 당시 요하지역 동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무제는 난하 하류에 그 정치적 중심지를 두고 있던 위만조선을 기원전 108년에 멸망시키고, 이어서 당시 대릉하와 요하 유역 사이에 위치해 있던 예맥조선을 그 다음해인 기원전 107년에 멸망시킨 다음 그곳에 현도군을 세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단군조선」도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단군조선」의 왕족의 주류는 그것이 최초로 건설되었던 조양의 아시달로 돌아갔고, 그 일부는 요하지역 북부와 동부 그리고 한반도의 대동강지역 등으로 남하했던 것으로 고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고찰해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한무제에 의해 멸망되기 이전 예맥조선이 기자조선과 남북으로 인접해 요하지역에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기」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연(燕)은.....(략)......북으로는 오환 (烏桓)․부여(夫餘)와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貊)․조선(朝鮮)․진번 (眞番)과 맞닿아 있어 그 나름의 이로움이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이야 말로 우리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의 구체적 논거가 될 수 있다.
기자조선의 천도
주 초기에 옛 상나라 사람인 기자의 일군이 동진해 와서 자리를 잡게 된 곳은 당시 ‘단군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난하 하류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난하 하류의 영평부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그 후 그 지역은 근 일천여년 간 기자조선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러나 기원전 281년에 와서 연의 진개의 침입으로 기자조선은 난하 하류에서 요하 하류의 험독(險瀆)이라는 지역으로 천도 했던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 후 기원전 256년 주(周)가 멸망하고 기원전 221년 진(秦)에 의해 전국이 통일되었고, 이어서 기원전 204년 한(漢)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자조선은 다시 정치적 중심지를 난하 하류의 동부 유역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 직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기원전 195년에 당시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을 정치적 중심지로 하던 기자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그 난하 하류 쪽의 왕검성(王儉城)이란 지역에 위만조선을 건설했다. 그러나 한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수도로 하고 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지역에 낙랑군 등 한사군을 설치했다.
‘고조선’은 전기의 ‘단군조선’과 후기의 ‘예맥조선’으로 양분되어 파악될 수 있다. 전기의 ‘단군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역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요서의 대릉하(大凌河) 상․중류지역에 위치한 조양(朝陽: 아사달) 일대에서 출현한 정치적 단체로 파악된다. ‘단군조선’을 일으킨 맥족은 요하의 서쪽 상류지역을 흐르는 시라므렌강을 따라 요서지역으로 들어와 그곳에서 적봉 (赤峰)지역을 통해 다시 남쪽의 대릉하 중류로 남하했다. 그들은 대릉하 상류의 우하량 유적지 인근에서 거주하던 곰을 숭상하는 부족을 기반으로 해서 조양 일대에서 ‘단군조선’이란 부족연합국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조양 일대가 ‘단군조선’ 의 첫 번째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그것은 중원에서 하(夏 : 성립 2070년 경)가 설립되기 이전에 요서의 난하 하류의 백악산(白岳山)지역으로 남하했던 것으로 고찰된다. 그 후 ‘단군조선’은 중원지역에서 기원전 18세기경에 요하지역으로부터 남하한 동이족에 의해 건국된 상왕조(商王朝, 1766∼1122, BC)와 장기간 남북으로 병립해갔다. 그러다가 상이 서아시아로부터의 철기문화의 전파를 배경으로 중원지역에서 출현한 화하족(華河族)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화하족은 상왕조를 무너뜨리고 주왕조(周王朝, 1122∼256, BC)를 일으켰는데, 중원문화는 그것을 계기로 요하지역으로 북진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단군조선’은 다시 그의 원래 지역이었던 조양 지역 인근의 장당경(藏唐京), 즉 지금의 부신(阜新) 지역으로 그 정치적 중심지를 이전시켰다. 그러한 정치적 중심지의 이동을 계기로 ‘고조선’은 ‘단군조선’에서 ‘예맥조선’으로 전환해 나왔다. 그러한 전환은 맥족을 지배층으로 한 ‘단군조선’의 정치적 중심지가 원래 예족이 거주했던 대릉하 중류와 요하 중류 사이에 위치해 있던 장당경 지역으로의 북상을 계기로 행해진 것이었다. 예맥조선은 그 지역에서 난하 하류지역의 기자조선과 근 10세기 가량 대치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은 결국 한무제에 의해 기자조선의 후신인 위만조선 이 멸망한 그 이듬해 107년에 멸망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고조선’은 요서지역에서 전기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단군조선’의 형태로 기원전 2300년경에 요서의 대릉하의 상․ 중류 지역에서 출현해 나왔고, 또 그것은 중원지역에서의 상주교체기 이후에는 대릉하 중류와 요하 중류 사이의 장당경 지역에서 ‘예맥조선’으로 전환해 나와 난하 하류의 기자조선과 대치해 갔던 것으로 고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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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죽국 [孤竹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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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상(商)과 주(周) 시대에 요서(遼西) 지역에 위치했던 제후국으로, 기원전 664년 제(齊) 환공(桓公)에게 멸망되었다. (?~BC 664)
중국 상(商)과 주(周) 시대에 롼허[灤河] 유역을 중심으로 요서(遼西) 지역에 존재했던 제후국이다. 상을 건국한 탕왕(湯王) 때에 분봉(分封)되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왕족(王族)의 성(姓)은 상 왕조와 마찬가지인 자(子)였으며, 씨(氏)는 묵태(墨胎)라 하였다. 초기에는 국도(國都)를 허베이성[河北省] 루룽[盧龍] 인근으로 하였다가 영지(令支, 지금의 河北省 遷安)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춘추시대에 서쪽으로 연(燕), 남쪽으로 제(齊)와 맞닿아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산융(山戎)의 압박을 받았다. 기원전 664년 제(齊)와 연(燕)의 정벌로 멸망하였다.
고죽국(孤竹國)은 상족(商族)의 지파(支派)인 묵태씨(墨胎氏) 씨족(氏族)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옌산[燕山]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상대(商代) 중기부터 점차 남하하여 허베이성 탕산[唐山] 일대에 자리잡았다. 1973년, 랴오닝성 카줘현[喀左縣]의 구산[孤山]에서는 ‘고죽(孤竹)’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상 시대의 청동기가 발굴되어 고죽국의 지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도 발굴되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와 위치를 둘러싸고 학계의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수서(隋書)>의 ‘배구전(裵矩傳)’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朝鮮)으로 삼았다. 한(漢)이 이를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낙랑, 현도, 대방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상(商)이 멸망한 뒤 기자(箕子)가 정착한 곳이 고죽국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죽국은 상이 멸망한 뒤에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설화와 관련된 나라이기도 하다. <사기(史記)>에는 백이와 숙제가 고죽국 군주(君主)의 아들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고죽국이 해주(海州)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역사적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도 중국 산시성[山西省]과 마찬가지로 수양산(首陽山)이 존재하는데, 그 때문에 나타난 전설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주가 건국된 뒤, 고죽국은 주족(周族)이 분봉되어 세운 연(燕)의 압박을 받으며 점차 요서 지역으로 세력이 위축되었다. 특히 서주(西周) 말기부터는 북쪽에서 산융(山戎)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산융은 남하하며 연을 압박하였고, 산둥성[山東省] 린쯔[臨淄]까지 내려가 제(齊)를 공격하기도 했다. 기원전 664년(周 惠王 13년) 산융이 연을 대규모로 침략해오자, 연(燕) 장공(莊公)은 제(齊)의 환공(桓公)에게 원병(援兵)을 요청했다. 제(齊)의 환공(桓公)은 산융(山戎)을 정벌하면서 고죽국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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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 관련 논고: 기후방정(㠱侯方鼎)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朴大鍾 2011. 3. 9.
기후방정(㠱侯方鼎)1973년 중화인민공화국 遼寧城 喀左縣 北洞村 제2호 교장(窖藏)에서 다음과 같은 네모난[方]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 청동기 바닥 부위에는 ‘화(戈+丮)’라는 인물로부터 상을 받은 사실을 기록한 명문 외에 위 사진에서와 같은 족휘명(族徽名)이 새겨져 있어 학계의 큰 주목을 끌었다. 필자는 이 청동기가 발견되고 나서 한참 후에야 해당 족휘명을 둘러싼 각종 논쟁과 誤解를 접하게 되었다. 이 명문에 ‘기자조선’의 ‘箕子’를 나타내는 글자가 들어있다는 주장을 대하고 크게 놀랐다. 과연 그럴까?
족휘라 함은 고대의 어떤 족속을 표시하는 휘기(徽記: 마크)이다. 위 족휘 명문 중에서, 亞(아)자는 주로 은상 때 사용되던 것으로, 그 안에 족휘나 글을 기재한다. 亞는 현재 복건성에 남아 있는 전통 가옥인 토루와 비슷한 것으로, 갑골학계에서는 네 개의 집이 서로 연결된 고대 건축물의 평면도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亞는 여기에선 일족인 대가족을 수용하는 거대한 집합주택의 모양에서 나아가 ‘족휘’를 표시하는 허사(별다른 번역은 하지 않음)로 쓰였다. 그리고 亞(아)자 안에 새겨져 있는 문제의 글자는 ‘㠱侯(기후)’이다. 己와 其로 이루어져 갑골문과 금문에 누차 등장하는 㠱자는 국명 또는 지명을 나타낸다. 따라서 㠱侯는 ‘㠱 땅의 제후’이다. 갑골문 및 금문에서 ‘箕(키 기)’자는 대부분의 경우 竹자 없이 주로 其(기)의 형태로 쓰였다. 그러니 其에 己가 덧붙은 㠱자와는 그 모양이 확연히 달랐으며, 현재에도 둘은 서로 다른 글자로 쓰이고 있다.
『집운』에 따르면, 㠱는 고대의 국명으로 위굉(衛宏)이 말하기를 杞(기)와 같다고 한다. 주방포(朱芳圃: 1895~1973)는 그의 저서『갑골학商史편』에서 “동작빈이 이르기를, 杞侯(기후)의 경우 은나라 무정 시엔 杞(기)자를 썼는데, 제신 때에 이르러서는 㠱(기)자를 썼다. 그러니 杞와 㠱는 古今異字이다.”라고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있는데,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은『兩周金文辭大系圖錄攷釋』에서 “杞는 姒(사)성의 나라이고, 이 㠱는 姜(강)성의 나라로 㠱와 杞는 동일하지 않다”라고 반박하였다. 김악(金岳) 또한『殷周㠱方非箕子辯』(문물계간, 1993-1)에서 출토된 청동기 명문들을 근거로 하여 㠱를 姜성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箕子는 은나라 왕족으로 子씨이니, 姜씨인 㠱侯와는 결코 동일 인물이 될 수 없으며, 이 㠱侯方鼎은 요즘 말로 하면 강씨 문중 물건이지 자씨 문중 물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요녕성 객좌현에서 발견된 ‘기후방정’을 가지고 箕子와 연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걸 가지고 상나라 멸망 후 箕子의 이동경로 및 기자조선의 위치를 비정하는 증빙자료로 삼거나 기자조선에 대한 고구려, 고려, 조선왕조 조상들의 기존 인식을 부정 및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箕子는 우리의 명백한 조상으로, 3천여년 전 천자국인 상나라가 패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정치 판도는 크게 변혁될 수밖에 없었다. 箕子께서 5천 명에 달하는 정예요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올 당시에, 고죽국을 비롯한 은상의 기존 여러 제후국들(㠱侯方鼎의 㠱國 포함) 또한 기자처럼 타지역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니, 그런 관점으로 요녕성 등에서 발굴되는 은상 시대 유물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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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숙신(肅愼)
소준섭 국회도서관 조사관 프레시안에서 발췌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때 완성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라는 역사서에서는 여진족이 숙신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숙신족'이라는 용어에서의 '숙(肅)'이라는 글자의 발음이 '주'라고 밝히고 있다("北音讀肅爲須, 須朱同韻"). 그리하여 '숙신'은 사실상 '주선'으로 읽혀진다.'신(愼)'의 중국어 발음이 'shen', 즉 '선'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직신(稷愼)'으로도 지칭되고 있는데 '직(稷)'의 중국어 발음은 'ji'로서 우리의 '조' 발음과 근접한 것을 알 수 있다.
금나라 시기 '여진(女眞)'이라는 만주어의 명칭도 중국의 연구 분석 자료에 의하면(何光岳이 지은『여진원류사(女眞源流史)』), '주선이었다(jusen -만주어로서의 '주선'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남송 시기에 徐夢莘이 지은『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3권에 따르면, "女眞古肅愼國也. 本高麗朱蒙之遺", 즉, "여진은 옛 숙신의 나라이고, 원래 고구려 주몽의 후예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진족(女眞族)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기에 들어서면서 만주족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쳐들어와 삼전도에서 조선의 왕을 무릎 꿇게 했던 바로 그 청나라 황타이지(皇太極, 청태종)가 '여진(女眞)'의 만주어인 '주신(珠申)'이라는 말이 당시 중국에서 '노예'라는 비칭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던 현실에 비춰 그 명칭을 만주족(滿洲族)으로 바꾸도록 했던 것이다.
한편 '말갈(靺鞨)족'이라는 용어에서 '말갈'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mo he', 즉 '모허'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민족 구성원으로 알려지고 있는 '맥족(貊族)'이라는 말에서의 '맥(貊)'의 중국어 발음이 바로 'mo'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 문헌에서 '맥족'과 같은 의미로서 사용되어온("貉,又作貊,亦称獩貉") 학족(貉族)의 '학(貉)'에 대한 중국어 발음이 바로 'he'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추론해보면, '말갈(靺鞨, mohe)'이라는 용어는 정확하게 '맥(貊, mo)'과 '학(貉, he)'이라는 단어로부터 기원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국 측의 만주족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이를테면, 중국의 '전국 문화정보자원 공향 공정(共享工程)'이라는 중국 정부의 관영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만주족 관련 자료>, "靺鞨, 是貊族同音詞, 是貊族與貉族融合而成的", 즉, "말갈은 맥족의 동음어이며, 맥족과 학족이 융합하여 형성되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물길족'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살펴보면, '물길(勿吉)'의 중국어 발음인 '우지, wuji'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나오는 나라인 '옥저(沃沮)'의 중국어 발음인 '워쥐, woju'와 유사하다. 실제 중국 측 관련 자료를 분석하면 '물길'이라는 명칭이 '옥저'로부터 기원했다고 설명되어 있다("勿吉族, 秦以前的居就, 秦漢之際的沃沮.....").
그리고 읍루족에 대해서도 압록강의 옛 별칭이 읍루강이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역시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하여 원래 조선족이라는 커다란 대(大) 민족 범주로부터 우리 한민족과 만주족이 분리되어 각기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간주된다.
신채호 선생도 자신의 저서『조선상고사』에서 "조선족(朝鮮族)이 분화하여 조선(朝鮮), 선비(鮮卑), 여진(女眞), 몽고(蒙古), 퉁구스 족이 되고, 흉노족이 천산(遷散)하여 돌궐, 헝가리, 터어키, 핀란드 등 족(族)이 되었나니......" 라고 기술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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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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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전인 『국어(國語)』·『좌씨전(左氏傳)』·『일주서(逸周書)』·『사기(史記)』·『회남자(淮南子)』·『산해경(山海經)』등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
식신(息愼)·직신(稷愼)이라고도 하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朝鮮)이라는 왕조명을 갖기 이전에 고조선인들을 부르던 호칭으로도 보기도 한다.
중국의 초기 기록인 『국어』에 숙신(肅愼)이고, 한(漢)대에 숙신(肅愼)의 후손으로 읍루(挹婁)를 지칭하지만,
후위(後魏) 대에 숙신을 물길(勿吉)이라고 하고, 수.당 때의『진서(晋書)』에 말갈(靺鞨)이라고 하여 고조선과 밀접한 중원(中原)의 북쪽 지역에서 요령지역 및 남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주민을 총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