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고조선과 낙랑의 위치(낙랑군 평양설-강단사학자) 1.낙랑군 평양설과 요서설의 논쟁

청 설모 2017. 4. 5. 01:10

너무 많은 논쟁이 있어서 정리를 해보고자 함.


1.고조선과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논쟁(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간의 치열한 논쟁)

 

옛 한나라의 지방행정조직인 낙랑군은 지금 국내 강단, 재야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대사 전쟁의 뜨거운 불씨다.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 강역 여러곳에 행정조직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그것이 곧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다. 기존 학계의 통설로는 한반도 북부 평안,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았던 진번, 임둔, 현도군이 현지민들의 저항으로 20~30년만에 없어지거나 만주 일대로 옮겨갔고, 고조선 중심부 평양 일대에 들어선 낙랑군만이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흡수될 때까지 400여년간 존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한사군이 정말 한반도 북부에 있었는지, 그 중에서도 핵심인 낙랑군이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 일대에 있었는지, 아니면 만주의 요동, 요서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위치 논란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쟁 이래로 유구한 전통을 이어왔다. 이미 조선 전기 <세종실록><고려사>의 지리지 등에서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다른 군들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는 추정이 제기됐다. 조선후기에는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한백겸, 정약용 등과 낙랑군의 요동설을 주장하는 이익이 서로 다른 논고를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낙랑군으로 초점을 좁혀 이 행정조직의 성격과 이후 삼한과 삼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놓고 재야, 강단사학계는 물론, 강단의 문헌사, 고고학계에서 논쟁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그만큼 낙랑군 설치 전후의 역사가 고조선과 마한·진한·변한의 삼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강역, 정치, 문화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낙랑군 논란은 20세기초 세키노 다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쓰,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학자들이 벌인 평양 일대의 한나라식 벽돌무덤과 토성 등 유적,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기본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이 유적들을 한나라가 점유했던 낙랑군 유산으로 기정사실화했고, 이런 견해가 오늘날도 국내 문헌사,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반면 국내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학자들이 식민지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 왜곡과 조작을 자행했다며 그들의 조사내용을 부정해왔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시작된 평양 부근의 낙랑 유적 조사가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위한 의도를 깔고 있다는 점은 양쪽 모두 수긍하는 쪽이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이 당시 벌인 현장 조사 내용을 전면 부정할 것인지, 수용한다면 어디까지 사실로 인정할 것인지는 아직도 쟁점으로 남아있다.

(한겨레에서 발췌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8337.html#csidxff6bf963f26295d8bc52416601d7f47

 

1920년대 통계에 의하면 평양 인근에는 1600여 기의 낙랑 무덤이 있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발굴 조사를 통해 낙랑 문화가 중국의 한나라 문화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원시 미개(未開) 단계에 있던 조선인은 한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을 통해 중국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문명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까지 북한은 평양 일대에서 2600여 기의 무덤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이 무덤들을 마한의 유적으로 해석하다가 최근에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던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평양 일대 무덤들은 낙랑군 유적이 분명하다. 특히 1990년대 초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현별 인구 통계를 정리한 목간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고고학 100여 년의 조사와 연구 성과에 따르면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음을 의심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조선닷컴에서 발췌)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28/2016042800081.html



“덮어놓고 ‘식민사학’? 사료 놓고 따져보자”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3981.html#csidxf01f963f9010707883a515dc84d57db

등록 :2016-03-08 20:42수정 :2016-03-09 15: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사학 박사)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강역이었다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지도라며 편찬에 참가한 학자들을 식민사학자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매국 대 애국의 프레임을 내건 셈이다.

   

■ 적극 대응 나서는 역사학계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가 내는 계간 <역사비평>은 봄호 기획특집(‘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에 젊은 학자 3명의 글을 싣고 “과거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 집착하는 일련의 비합리적인 행위”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규정했다.

 

젊은 학자들은 국회 역사특위 토론 과정에서 보수세력은 물론 일부 진보적 지식인과 야권 정치인들마저 이른바 위대한 상고사 주장에 동조하고 나선 데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이정빈 고대사·고고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위대한 상고사를 얘기하는 주장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 더불어민주당·정의당 일부 의원도 호응한다. 이런 흐름은 고대사를 강조하는 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뒷받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진보적 역사단체들이 연대하여 이런 흐름을 막고 사실과 사료에 근거한 정확한 역사를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2월 문 연 창비학당의 역사강좌에 임기환·송호정·강종훈(고대사), 도현철·안병우·한명기(중세사) 같은 중견 학자가 대거 나서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학문 성과를 모아 작업해온 역사지도 편찬사업이 좌초될 처지에 놓였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낙랑군 한반도 설치설이 식민사학? 국회 토론 과정에서 이덕일 소장은 낙랑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에 비정(비교하여 정함)하는 학계 통설을 두고 “일제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 이래 식민사학의 카르텔”에 따른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 주장의 반복이라고 주장했다. 학계는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우선 낙랑군 평양 설치설은 일본 학자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여러 논리는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서 다 나와 있었으며, 이들은 국내 사료와 중국 1차 사료로 상당한 연구를 진척시켰다는 것이다. 17세기 이익이 요동설을 주장했으나 17세기 한백겸, 18·19세기 유득공·정약용·한진서는 낙랑 중심지는 평양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사군 한반도설=식민사학이란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위가야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고 얘기한다.


 또한 통설은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이후 평양에서 발굴된 고분 유물 발굴 성과와 사료 연구 축적에 힘입어 비정됐다고 지적한다. 안정준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장은 “일제 때 발굴된 황해도·평안도 일대 낙랑 고분 수는 70기에 불과하지만, 해방 이후 발굴한 고분은 1990년대 중반까지 2600여기에 이른다”며 “이병도는 연구사적으로 낙랑군 한반도 비정을 결정지은 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사군 전공자인 윤용구 박사(인천도시공사 문화재부장)는 “한사군 관련 논문 1000여편 중 이병도의 논문은 10편뿐이며 그나마 현도군 등의 위치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다 부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 “낙랑은 고조선인이 주축이 된 사회”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공격을 받아 함락될 때까지 420년 넘게 존속했다. 학자들은 외려 한국 학계가 유물·사료 연구를 통해 낙랑이 중국사회였다는 오랜 통념을 논파했다고 밝힌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은 식민사관에 입각해 낙랑 지배층은 한족, 피지배층은 고조선계 토착민이라고 주장했고, 중국 학계에도 낙랑이 중국사회라는 통념이 있었다. 그러나 학계가 평양의 낙랑 지배층 고분(나무곽무덤)에서 다수 발굴된 고조선계 세형동검(한국식 동검)과 인구·호구 조사를 기록한 목간을 연구하여 “낙랑 지배층 상당수가 고조선 토착민이고, 낙랑의 실질적 주인은 위만조선 이래 그곳에 살아온 고조선 사람들”(윤용구)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안정준 분과장은 “낙랑군에 중국인은 소수였고 토착민이 압도적이었다”며 “한의 군현이란 외형과 거기 파견된 중국 관리의 존재만으로 낙랑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근대 이후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영토 관념에 투영시키는 것은 당시 시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낙랑 위치 쟁점 보니 최근 몇년 새 제기된 낙랑 요서설이 비전공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것은 “중국 1차 사료”를 거론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몇년 전까지만 해도 <환단고기>에 기댄 위대한 고조선론이 주종이었던 반면, 이덕일 소장과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은 <한서>, <사기>, <후한서>, <태강지리지> 같은 중국 사서를 얘기한다.(표 참조) 이 소장은 여러 사료를 거론하며 낙랑의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청대 <독사방여기요> 기록을 근거로 낙랑은 중국 허베이성 루룽현(현 창리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석구 한밭대 교수(고구려발해학회 회장)는 “낙랑군 조선현이 루룽현에 있다는 그 기록은 한반도의 낙랑군이 멸망한 뒤 일부 유민이 요서로 옮겨간 상황을 적은 것이며 그 지역 패권자 모용외가 유민에게 낙랑군을 만들어주고 낙랑태수란 관직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심 원장은 청대 <사고전서>에 집대성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는 대목을 들며 “갈석·갈석산은 허베이성 바오딩(보정)의 수성(쑤이청)진”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요서설보다 더 서쪽에 낙랑이 있었단 주장이다. 공 교수는 “우뚝 솟은 돌산이란 뜻의 갈석(갈석산)은 기록상 적어도 두 곳 이상 있다”며 “<태강지리지>의 갈석산은 바오딩이 아니라 루룽현 갈석산을 설명하는 사료이고, 낙랑 일부 유민이 루룽현 지역으로 옮겨간 상황을 적은 것”이라고 말했다.
 허미경 선임기자 carmen@hani.co.kr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33981.html#csidxf01f963f9010707883a515dc84d57db


2.낙랑군 평양설(강단사학자)

(1)낙랑관련 유물과 유적

http://xakyntos.egloos.com/v/2664425 에서 발췌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 낙랑군 관련 유물이 천문학적인 수라는 사실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아래에 링크한 사이트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국가문화유산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 서비스하고 있는 금석문 데이터베이스이다. 한국과 관련된 금석문들을 방대하게 싣고 있으며, 일부 유물들은 실제 탁본도 제공한다.자, 낙랑 관련 금석문을 한 번 찾아보자.


낙랑 관련 금석문의 총 개수는 394개. 이 안에는 100여 개의 봉니를 비롯하여 명문이 새겨진 칠기, 벽돌, 기와 등 수많은 종류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저 유물 모두에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명문-연호라든가 낙랑군 소속현명이라든가-이 새겨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새겨진 명문들을 통해서 충분히 개연성있게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다.어쨌거나, 낙랑 관련 금석문의 수가 약 400개라는 건, 의외로 적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다른 시대의 금석문은 몇 개나 될까?고구려 60백제 56신라 64가야 11통일신라 110발해 27고려 706조선 1752...............................삼국과 가야, 통일신라, 발해까지 모든 금석문을 합쳐도 낙랑 금석문 한 카테고리보다 적다. (물론 시대적으로도 훨씬 가깝고 유물도 많은 고려나 조선은 논외)낙랑군 유물의 위대함(?)이라고나 할까....


사실 낙랑 금석문과 다른 삼국의 금석문을 단순 수량으로 비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낙랑은 다른 삼국과 달리 한식 문화권이었고, 그래서 삼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벽돌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벽돌은 틀로 찍어내기만 하면 간단하게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명문을 남기기에도 훨씬 유리하다. 삼국의 와명(瓦銘)·전명(塼銘) 유물은 모두 합쳐도 50개에도 못미치는 데 반해 낙랑의 와명·전명 유물은 139개에 이른다. 봉니 100여 개와 합치면 60~70%가 사라진다.물론 그렇게 제외해 놓고 봐도 압도적인 수량이긴 하지만.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gskr&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gskr_003_0010&position=-1



 
(2)낙랑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낙랑군 ‘한반도 서북 지역 존재’의 결정적 증거, 낙랑 목간을 둘러싼 논란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옛 낙랑군은 오늘날 중국 땅인가, 북한 땅인가. 독립국가 혹은 중국 식민지였는가. 2년여 전 북한의 수도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2000여 년 전 낙랑시대 나무쪽 문서(목간)가 남한 학계의 해묵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목간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동시대 중국 공문서 목간.

 1993년 중국 장쑤성 롄윈강에서 발견된 기원전 10년께의 한나라 묘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관할지 면적,호구,인구 증감 등을 담고 있어 이번에 출토된 낙랑목간의 원형을 짐작케하는 유물이다.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지난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평양 일대는 낙랑군 통치 지역?
윤 학예사는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 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남쪽 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동쪽 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 통계를 보면, 고조선 도읍이었고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학예사는 <후한서> <한서> 등 기원후 한나라 사서의 인구통계와 비교한 결과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8%로 중원 다른 지역의 정상적인 증가율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또 조선현 등 직할지 11개 현은 인구밀도가 높아 대부분 2천 호를 넘었다. 반면 동부도위나 남부도위는 1천 호 미만의 작은 현이 각각 3개, 6개였다. 동부도위의 동이현(함남 안변으로 추정)은 279호 203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주류학계는 목간의 이런 통계 내용들을 한반도 서북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음을 새삼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 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 드러내”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윤 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는 낙랑의 강역 문제는 우리 고대사의 미묘한 쟁점이다. 낙랑군의 변천사 자체가 만주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킨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로 공개된 낙랑 목간은 새삼스런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이미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 목간의 의미와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싸고 누리꾼과 아마추어 애호가,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 다시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낙랑 목간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평양 부근에서 다섯 차례 발굴됐다. 전모가 파악된 것은 일제시대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간뿐이며, 해방 뒤에는 90년대 <논어> 구절을 새긴 대나무 목간(죽간)들이 출토된 사실 정도가 알려졌다.

(한겨레에서 복사)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